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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Oct 25. 2021

오답의 행복

틀릴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아.

 열심히만 하면 될 거라 믿고 준비했던 시험에서 미끄러지자, 그 바닥은 지독한 우울감과 상실감의 늪이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은 어느새 나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으로 바뀌어 열심히 물을 부었던 내 항아리가 사실 밑 빠진 독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울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사람 만나는 것도 피곤하고….. 그냥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다가 잠이나 잘래.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나한텐 그게 최고의 처방이야.


거의 일주일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냈을까. 밀도가 낮은 시간은 가볍고 빠르게 흘렀고, 나는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7일을 내리 충전했는데도 내 몸은 고장 난 전지처럼 채워지지를 않았다.



“제발 나가!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든지 하다 못해 걷기라도 하라고!”


그쯤 되니 주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화가 섞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성화에 더 이상 침대 위의 평온을 유지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나는 등 떠밀리듯 밖으로 나왔다.




‘가고 싶은 곳도 없는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목적지 없이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입고 나온 옷만큼이나 칙칙한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쨍한 여름의 채도가 얄미울 정도로 날이 좋았다. 텐션을 올려보겠다고 신나는 노래로만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가 효력이 있었는지, 더운 날씨에 이마에 흐르는 땀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걷다 나온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그저 그런 커피를 마셨다. 너무 맛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틀렸었네. 나오니 참 좋다.




자존심과 승부욕으로 똘똘 뭉쳐서, 내가 틀렸다는 걸 마주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무조건 내가 옳다는 답을 얻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때론 내키지 않는 산책이 답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그날처럼 내가 틀렸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에서 행복을 찾기도 하더라.


물론 살면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오답은 우울할 때 산책이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는 것보단 훨씬 더 뾰족하고 아프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상대가 알고 보니 스쳐가는 인연이었다던가, 내 길이라고 굳게 믿고 걸어왔던 길의 중간에서 ‘통행금지’ 표시판을 마주하고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던가. 특별하다고 느꼈던 내 존재가 사실 한없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던가.

하지만 오답 표시가 쾅 찍힌 모든 통지표엔 단순히 ‘네가 틀렸어’라는 한 줄만이 적혀있지만은 않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분명 작지만 선명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다.


‘너는 네 생각보다 더 잘난 사람일 수도, 못난 사람일 수도 있으며 네가 진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거짓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서 너의 내일은 오늘과 다를 수 있어. 뻔하지 않은 내일이 있다는 건 꽤 멋진 일이잖아.’



내가 알고 있는 게 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새로운 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는 그 답이 궁금해서라도 조금 더 살아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내가 틀렸다는 걸 온몸으로 마주하는 순간은, 내가 내일을 살아보고 싶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게 내가 찾은 ‘오답의 행복’이다.





P.S. 그래도 점수가 매겨지는 시험에선 오답보다 정답이 더 좋다. 아, 그때 그 문제 3번으로 찍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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