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계의 국민 첫사랑인 노란 맥심 커피믹스와의 강렬한 첫 만남 이후, 어린 나는 엄마가 믹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은근슬쩍 한 잔 얻어마실 생각으로 그 곁을 서성거리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믹스커피는 세상을 10년도 채 경험하지 않은 꼬마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커피 향과 우유의 부드러움, 그리고 달달함까지 갖춘 완벽한 맛의 밸런스에, 마시고 있자면 뭔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주는 마법의 한 잔이었달까.
아마 내 또래 대부분의 첫(커피)사랑은 이 노랑 커피믹스였을거다. 여기에 에이스 안 찍어 먹어본 사람 없잖아요?
그러나 믹스커피와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엄마라는 강력한 적(?)이 나와 커피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 운이 좋은 날엔 믹스커피와의 아름다운 재회가 성사되었지만, 대부분의 날엔 엄마는 본인의 컵에서 한 모금 정도만을 허락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커피는 어른들이 마시는 거야. 애들은 마시면 머리 나빠져!”
성인이 된 후로 아메리카노 없인 노트북을 켤 수 없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시커먼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시는 어른이 되고 보니, 엄마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커피는 머리를 나쁘게 하는 독약이 아니라, 똑똑해지게 하는 마법 물약에 가까운 존재이지 않나. 일이든 공부든 시작에 앞서 커피 한 잔을 꼭 챙겨 마셔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니 말이다.
학부생 시절 내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과제들엔 커피 향이 짙게 배어 있고, 나는 내일도 의식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할 때 비로소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할거다.
그러니까 커피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던 우리 엄마는 순 거짓말쟁이이자, 혼자 똑똑해지고 싶었던 욕심쟁이였던 거다. 그래서 나 어릴 적 우리 엄마는 뭐든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였던 건가. 그럼 나는 앞으로 몇 잔의 커피를 더 마셔야 엄마만큼 현명해질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