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대리 May 27. 2023

딱 2년 운영한 앱을 싹 접으란다.

열심히 해보라며 1on1한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나는 우리 회사가 21년도에 런칭한 2살짜리 앱 담당자다.


내가 입사했을 때 우리 팀 서비스는 런칭을 앞두고 있었고, 물론 내가 이 프로젝트의 최초 발의자는 아니지만 서비스 오픈 후에도 내가 주도적으로 기획해서 출시한 서비스가 3개나 있으니, 그리고 중간에 팀장님을 포함한 담당자들이 우르르 팀을 나가 팀에서 내가 제일 앱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이 앱의 주인이라고는 할 수 있는 수준이다.


2년 전 요맘때 내가 이 회사, 이 포지션에 지원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전에 다니던 회사 대비 프로덕트 오너로써 너-무 매출에 대해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 상태에서 보다 "많은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앱을 만든다고 본부가 신설될 정도니 제조업 베이스였던 전 직장 대비 앱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1) 내가 서비스에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넣어야 할 상황일 거라 기대했고, (2) 글로벌 시장을 타겟팅한 전 회사 서비스 대비 이 회사의 앱은 국내 시장을 타겟팅했기에 VOC도 더 자주, 많이 받고 그만큼 개선의 질과 양이 고퀄일 것이라 생각했고, (3) 회사에서 애초에 이 사업을 수익 창출보다는 사회적 가치(적어도 신문 기사 상으로 드러나기론) 창출을 위해 추진하는 듯했기에 타 팀 사업보다는 실적 압박이 크-게는 없을 것 같다는 앞으로 일하기 좋을 점들만 상상했었다.


그런데, 이런 내 기대는 20000% 현실과 달랐다.


(1) 이 사업을 한다고 받아낸 투자심의를 까보니 법률 상 이슈로 인해 아예 BM자체가 워킹 안 하는 모델로 현란한 매출 시뮬레이션을 돌려놓았고(투자심의가 통과된 시점 기준 1년 후 금융 소비자법이 신설되며 금융상품판매 자격증이 없는 우리 회사는 금융 상품 중개가 불가하게 되었으니, 분명 당시에도 법무팀의 조언이 있었을 것이었음에도 이는 무시된 채 매우 과장된 매출로 보고서만 작성되었던 것 같다), (2) 원활한 초기 회원 확보를 위해 투자한 회사 역시 본인들의 미래를 지극히도 장밋빛으로 그려놓아 이만큼 앞으로 모을게요! 했던 숫자대비 10%도 안 되는 회원 수를 모아주셨고, (3) 우리 자회사니까 자회사 시스템이랑 우리 앱이랑 연동하는 일은 우리에게 controlability가 있어서 매우 쉬울 거란 팀장님의 말과 달리 우리는 협조 안 할 건데?라는 모드로 일관한 자회사..^^ (결국 여기와는 1도 콜라보를 못함)


이렇게 여러모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2년 간 마케팅 비용 딱 2천만 원만 써가며(그마저 신규 회원가입 시 커피 쿠폰 증정 이벤트) 4천 명의 회원을 모아 커머스도 하고, 가계부 서비스도 제공하며 조금씩 매출을 일으키던 어느 날.


담당 실장님은 운영비가 꼬박 월 1억씩 나가는 우리 앱이 고작 월 매출 5백만 원  수준으로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를 시전 하더니 본인이 지난 회사에서부터 친분이 있는 외부 제휴사와 jv를 맺어 제2차 도약을 해보자며 투자를 위한 보고서 작업을 요청했다. 200억을 태우면 월 매출 1억 커버가 가능합니다.. 느낌으로(이 수준도 우리 앱의 최초 투자심의 같은 뻥튀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투자심의를 통과할 좋은 숫자 위주의 보고서 말이다.


이 얘길 실무자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실장님은 나에게 1on1을 여러 차례 요청하며 투자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은 고되겠지만, 이게 우리 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며 같이 열심히 일해줄 것을 당부했다. 외부 강의만 수백 번 해본 달변가 실장님의 말이 하나씩 귀에 박히며 그래, 앱 운영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일단 살리는 게 중요하지라는 생각이 면담 후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우리 회사는 굉.장.히 보고서를 중시하에 같은 팀 과장님과 나는 둘이서 해당 회사 직원들도 만나보고, 숫자도 뽑고, 보고서 작업도 하느라 5개월이 넘는 시간을 이 작업에만 쏟았다. 예상되시겠지만, 이 작업에 매진하느라 사실 앱 운영은 거의 산소 호흡기만 간신히 붙은 상태로 유지해 왔고 말이다.


그렇게 최종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는 날을 눈앞에 두던 지난주, 갑자기 실장님이 아무래도 회사에 현금 없는 지금 시점에서 외부에 몇 백억 씩 투자를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보고서만 51번째 버전인데^^ 그리곤 아무리 봐도 우리 앱은 망했고, 접는 게 맞으며 잘 접기 위한 논리가 담긴 보고서를 다시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아니 그냥 이렇게 갑자기 문 닫아버린다고? 고작 2년, 베타 오픈 제외하면 1년 밖에는 운영해보지도 않아 놓고? 돈이 전혀 안 드는 방법으로만 신규 제휴사 찾아오래 놓고 매출과 회원 수 없다고 타박한다고? 하.


앱을 살리고 더 열심히 일해보자는 1on1으로 마음을 다잡은 지 몇 주도 되지 않은 지금, 나는 내 손으로 키운 내 자식 같은 앱은 왜 닫았는지, 왜 망했는지, 이 앱의 미래가 왜 없는 게 맞는지 한껏 암울한 지표에만 초점을 맞춰가며 '앱 중단 보고'를 위한 보고서 작업, 매출 시뮬레이션, 앞으로의 계획.. 을 보고서 52번째 버전으로 다시 쓰고 있다.


누가 앞으로 미래가 없는 서비스를 운영하거나, 관련된 일을 맡는다는 데 파이팅 넘치게 온 힘을 다해 매진하겠는가? 거의 없을 거라고 보면 된다. 나 또한 그런 감정이니까.


그런데 뭘 어쩌겠는가?

(1) 꾸준히 100명의 신규 유저가 우리 앱에 유입된다는 긍정적 시그널이 있지만, 월에 억 단위는 태워서 얻는 게 고작 유저 100명이라는 지적에 딱히 대응 논리를 펼치지 못하는 게 우리 앱의 현실임은 부정할 수 없고, (2) 윗사람들이 시킨 과제를 잘 끝마치라고 월급을 받는 게 직장인들의 삶이기도 하며, (3) 앱을 시작하고 운영까지 해보고 아름다운 중단까지 시켜보는 게 의미 있는 경험이라면 경험일 수 있으니 그저 앱 fade out 계획 보고를 앞으로 열심히 준비하는 수밖에.


올해로 직장 생활 8년 차, 이 회사에서는 2년이 좀 안 되는데 직장에서 남은 30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원래 회사 생활은 이런 거라면.. 참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재미없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좀 더 작은 회사, 혹은 외국계로 옮기면 나아지려나? 직책자가 되면 달라지려나?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실패할 기회를 허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