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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대리 Jan 31. 2023

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꾸역꾸역 해내며 사는 당신에게

그래도 너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1. 이 글 제목이 지칭하는 '당신'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2.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지난 한 달을 돌아보면 난 올해 단 하루도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내지 않았다.


3. 근데 '진짜 하고 싶은 거'란 뭘까?


4. 아마도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시간과 비용과 마음을 써가며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는 행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 취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려나.


5. 안타깝게도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의 절반을 회사에서 보내는 나는 작년 말 부로 조직 개편을 겪었고, 지난 조직에서의 역할이었던 이미 잘 갖춰진 특정 서비스의 운영 업무는 뒤로한 채 새 팀에서의 내 역할은 사업의 방향성을 처음부터 재진단하고 전략을 짜는 보고서 찍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6. 사실 여전히 춥다는 취업 시장에서 그냥 뭐라도 시켜주고, 자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7. 하지만 내 역량은 거시적 관점에서 사업을 바라보고, 윗사람들 입맛에 맞는 논리적인 보고서를 쓰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고객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듣고 작은 개선을 해나가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단 말이다.


8. 지금 하는 일에 등장하는(등장해야 하는데 내 역량 부족으로 아직 못 담고 있는) 각종 수식이 들어간 엑셀 시뮬레이션, 기업 가치 평가, 재무 용어들... 은 참으로 나에게 어떠한 즐거움이나 호기심, 보람도 주지 못한다.


9. 하지만 어쩌겠는가.


10. 이 회사에 경력직 용병으로 와있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일에 적어도 빵꾸가 나지 않게 그럴싸한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거겠지.


11. 모르는 게 하도 많으니 가치 평가나 실무 엑셀 관련 유료 강의와 책,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새로운 지식을 매일매일 쌓고 있다.


12. 회사에서도 앉아서 계속 엑셀과 파워포인트 작업만 하느라 고역인데, 이젠 집에 와서도 관심 없는 콘텐츠들을 꾸역꾸역 보고 있노라니 어제는 너무나 우울해서 '내 삶의 주인이 지금 내가 맞나?'란 생각이 들었다.


13. 우울 열매를 한 박스 먹은 내 심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오늘은 회의 도중에 같은 조직 개편을 당한 과장님이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14. 12의 이야기를 언급하니 과장님도 본인 역시 조직 개편 이후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고, 잘하는 분야가 아니라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해내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15. 나랑 정확히 똑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16. 그래도 과장님은 업무는 개떡 같아도 집에 가면 사랑하는 딸이 반겨주고, 주말이면 좋아하는 농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버텨낸다고 했다.


17. 과장님과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먹여 살려야 할 식구 유무도 있겠지만 농구라는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게 있다는 것이다.


18. 나는 가끔 굳이 찾아서 가는 맛집 가기, 가끔 삘 꽂히는 옛날 영화 보기 정도 외에는 굳이 뭔갈 하고 싶은 게 없다.


19. 직장에서의 업무는 내 입맛에 맞게 바꿔달라 요청할 수 없으니 직장 외에서라도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삶의 발란스를 유지해야 하는데,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으니 그저 해야만 하는 '하기 싫은' 업무에 매여 하루하루를 암울하게 보내고 있던 것이다.


20. 그리하여, 오늘은 귀찮고 피곤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쇼핑도 좀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석촌호수 주변도 한 바퀴 돌며 겨울 내음도 맡아보려 한다.


21. 이렇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지는 행위들을 이따금씩이지만 반복적으로 해주면 언젠간 과장님처럼 찐한 취미가 생길지도, 아니면 또 1년이 빠르게 지나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업무로 직무 배치가 다시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2. 힘내자, 연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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