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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Sep 04. 2019

10. 중탕 할아버지, 데릭

생각이 나는 단골들

2019년 봄, 밴쿠버에도 벚꽃 길들이 많다. 비록 꽃이 핀 기간은 짧더라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안토니우스와 중탕 할아버지


    식당에 오는 손님들은 최소 1주일에 한 번 이상 들리는 단골들이 많다. 맛이 있기 때문이다. 밴쿠버에는 한국인들이 하는 스시 레스토랑이 정말 많다. 근거는 모르겠지만,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 외곽까지 합치면 최소 800개 이상은 한국 사람이 한다는 말도 떠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Sushi’라는 간판이 붙은 곳은 한국 사람이 하는 곳이 80% 이상이다.

    중국인들이 하는 스시집도 있지만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매우 싸게 받으면서 맛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곳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니기리 스시’만 집중적으로 하는 고급 일식집도 있지만 매우 드물다. 한 때 일본사람들이 일식당을 많이 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밀려 밴쿠버 중심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현상이 일어날 정도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인이 하는 일식당의 장점은 어느 정도 맛을 내면서도, 가격이 너무 비싸지는 않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하는 스시집만큼 싸지는 않다. 그러나 ‘싼 게 비지떡’이라고 약간 돈을 더 내더라도 롤이나 사시미를 먹고 싶어하는 백인들이 그만큼 많다. 

    인근에 있는 일본인이 하는 스시집은 쉬는 날이 많다. 왜 쉬는 날이 많은가 궁금했다. 딱히 객관적인 답은 없었다. “걔네들은 그렇게 장시간 오래 일하고 싶어하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리고 단가를 좀 더 높게 받아도 일본 사람이 한다는 이유로 손님들도 돈을 더 내고요.” 그러고보니, 일만 소처럼 하는 한국에서의 삶이 싫다고 온 한국인들은 캐나다에서도 열심히, 길게 일한다. “한국에서 일하던 것처럼 캐나다에서 일하면 다 성공하는데, 다들 (성공보다는 여가를 즐기려는) 캐나다인처럼 변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던 채소가게 사장님 말이 떠올랐다. 뭐가 더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

 

    식당 단골 손님 중에 생각이 나는 두 명을 꼽으라면, 이탈리아 이민자인 안토니우스 할아버지와 ‘중탕’ 할아버지를 꼽고 싶다. 안토니우스 할아버지는 젊을 때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했다고 한다. 20대 때 그리스에 이민 갔다가 이후에 캐나다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퀘백에 사는 딸과 미국 LA에서 변호사를 한다는 딸 자랑을 엄청 많이 한다. 그러나 이혼 후 홀로 살고 있다보니 외로운 것 같았다. 가게에 0507로 끝나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오늘 어느 직원이 일하느냐”고 자꾸 묻는다. TO-GO 주문전화를 받느라 바빠 죽겠는데, 귀가 어두운 안토니우스는 몇 번이나 전화해서 “안 들린다. 누가 나오느냐”고 외친다. 

 

    주문도 자기 취향대로 자꾸 바꾼다. 베지뎀뿌라도 5개 채소가 정해져 있는데, 꼭 자기 맘대로 “나는 새우 3개, 아스파라거스 3개로 바꿔줘. 새로 왔니? 다른 직원 없어?”라며 투정을 부린다. 맨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근처에 일본인이 하는 OO스시는 맥주가 차가운데 너네는 왜 미지근하냐”며 투덜거린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지 1주일 넘게 안토니우스가 안 나왔다. 뭐지? 걱정이 된다. 죽었나?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안 나오면 정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나 너무 아파. 나 911 불렀어. 너네 가게 전화번호를 댔어.” 횡설수설하는 전화기 속 목소리가 애처로왔다. 정말 아픈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홀대했나? 그리고 한참 2주 뒤가 지났을까. 안토니우스가 가게로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데 평소와는 모습이 좀 달랐다. 바지를 너무 내려 입어서 팬티 윗 부분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한 손님은 황급히 그냥 나갔다. 안토니우스의 얼굴은 핼쑥했다.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도, 그걸 지적해줄 가족이 없었기 때문일까. 할아버지 맨날 돈 많은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초라해보였다. 나이 들어도 꽤나 이탈리아 남자의 멋이란 멋은 부리던 모습이 다 사라졌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는 내게 사근사근하게 잘 해 주었다. 그런데 70살이 넘어도 남자는 남자인가 보다. 내가 기혼자에 애까지 달렸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내게 보였던 관심이 오히려 차가운 냉대로 바뀌었다. 아니, 내가 애가 있고 남편이 있는게 무슨 상관이고. 자신이랑 뭘 해볼 사이도 아닌데. 아무런 발전이 없는 관계일지라도 미혼여성을 더 좋아한다는 것인가. 처음 내가 일할 때는 따뜻하게 대하면서 복권을 긁다가 내게 말했다. “나 예전에 2등 한 적 정말 있어. 이번에도 되면 우리 반반 하자.”

 

    자꾸 말을 걸까봐 시선을 피하는 웨이트리스들 사이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안토니우스는, 오늘도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 보는 것 같다. 다들 우리처럼 회피하겠지. 그러고보면, 결혼과 자녀라는 것이 독거노인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 같지 않다. 다들 ‘혼자서 쓸쓸해. 결혼해’라고 말하지만 남편도 나도 동시에 눈을 감는 건 아니지 않는가. 퀘백과 LA처럼 당장 달려와줄 수 없는 곳에 사는 딸들보다는, 매일 눈 흘겨가면서 말 몇 마디라도 나누는 스시집 한국 여자가, 이 사람에게 제일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식당 전에 일하던 채소가게 앞에서, 한참을 여러 명이 오케스트라처럼 연주 했던 적이 있다. 일요일이어서 공연을 채소가게 앞에서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몇 곡의 연주가 끝난 뒤, 연주자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OOO씨가 몇 일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 자기가 좋아했었고 매일 평범하게 지나다니며 일상을 보내던 곳들을 지나가며 즐거운 연주곡을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곳도 그가 자주 장보러 왔던 곳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두 번째 단골손님인 ‘중탕 할배’. 중탕 할배의 원래 이름은 데릭이다. 사실 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영어교과서에서 배운대로 ‘Sir’과 같은 단어를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 영국이나 영연방에서는 옛날 문화대로 ‘써’라고 부르면, 대접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카페나 빵집에 갔는데 누가 나를 ‘맴(Ma’am)’이라고 부르는게 딱히 좋게 들리진 않았다. 아줌마라는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이 좀 많은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인 것 같기도 했다. 굳이 내 나이를 가늠해서 불러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중탕 할아버지를 어떻게 지칭할지 몰라, 어느날 이름을 물었다. 그는 정말 좋아했다. 그래, 역시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는게 좋은 거야.

 

    그가 중탕 할배로 불리게 된 이유는 데워 먹는 술 때문이다. 사케를 약간 데워서 파는데, 그는 “절대 가스렌지(microwave)로 돌리지 말아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건강에 나쁘다며 중탕을 원했다. 그래서 중탕을 해드렸는데, 어느 날 공교롭게 그의 사케가 나갈 때쯤 ‘땡’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걸 돌리는 소리였는데, 그는 오해를 했다. 화를 내면서 뭐라고 하길래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보통 그렇게 진상을 부리고 나면, 자신도 그 가게를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텐데. 진상들은 이상하게 꼭 다시 온다. 그것도 자주 말이다. 

 

    그런데 중탕 할아버지가 언젠가부터 계산을 자꾸 재촉하기 시작했다. 보통 백인 손님들은 웨이트리스가 바빠 보이면, 웃으면서 참고 기다린다. 그랬던 사람인데, 갑자기 빨리 계산해달라고 호들갑을 떠니,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유를 알았다.


    “미안해. 내가 요즘 기억력이 나빠져서 계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몰라서 생각이 날 때 빨리 계산하고 싶었어.” 매번 계산을 할 때마다 영수증이 필요없다고 버리라고 했던 그는, 이제는 매번 영수증을 챙겨 지갑에 넣었다. 계산을 했다고 착각하고 다른 식당에서 나가다가, 무전취식처럼 도망가는 걸로 오해받았던 모양이다.

 

    내가 캐나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노인 손님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곱게 나이들어 아름다운 한 백인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변해가고 있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를 틈타 우리에게 말했다. “자꾸 반복해서 같은 내용을 질문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중탕 할아버지도 기억이 나빠지는 자기 모습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안토니우스도 ‘아직 여자들과 잘 해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릴만큼 더 노쇠할지도 모르겠다(한국 여자들이 안 되니 요즘은 필리핀 여성들로 타켓을 바꾸었다). 

 

    노인 손님들을 보면,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가 먼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에서, 먼 한국에서, 또 캐나다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서로 웃으면서 만나고, 헤어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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