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까지 와서 꼰대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에게도 1988년생, 1993년생,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 그런 후배들과 팀원들이 있었다. 나는 늘 그들에게 밥을 사주고, 나의 지식을 나눠주는 (대놓고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굉장히 열려있는) 팀장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는 그냥 기계에 무지하고, 배우는 데 느려터진 동료였다. 아니, 민폐녀였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의 조직과 팀에서 일했던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채소가게가 적성에 잘 맞지 않아 일식당으로 일을 바꿨다. 식당에서 POS기를 이용해 주문을 빨리 넣고, 전화로 투고(TO-GO) 주문을 빨리 받아야 했다. 그런데 컴퓨터 화면 속 메뉴 위치가 생각만큼 외워지지 않았다. 메뉴를 빨리 누르고 다음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화면을 빙빙 맴돌며 눈으로 빨리 찾으려고 애써도 쉽지 않았다.
반면 어린 친구들은 달랐다. 워킹홀리데이로 온 20대 친구는 반나절만에도 다 외웠다. 한 번은 주문 누르는 속도도 느린 데다, 전화로 걸려온 영어가 듣기 어려웠다. 그리고 주는 대로 먹는게 아니라 무슨 알러지가 그리 많고, 싫은 게 많은지. 아게다시 도후(튀긴 두부에 소스를 뿌려먹는 에피타이저)에 뭐가 들어갔는지 물어보고 가츠오부시는 빼달라는 사람, 아보카도는 빼고 돈을 더 내도 좋으니 추가로 다른 뭐를 넣어달라는 사람. 그 때마다 포스기에 제대로 입력을 해야 했다.
계산도 단순한 것 같지만, 처음에는 모르는 버튼도 많았다. 잘못해서 다른 테이블의 계산서를 엉뚱한 사람에게 주고 그 금액대로 계산했다가 환불을 해주게 된 경우도 있다. 단 한 번의 실수였지만 환불하는 과정을 너무나 복잡했다.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는 것은 내 부모밖에 없다. 행동이 굼뜨거나 빨리 처리를 못하면 민망했다. 20대 중반인 한 친구는 “언니…”하고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 부장님들이 말씀하는 “우리 땐 말이지 그까짓 일은…”으로 시작되는 훈계는 정말 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은 5살 짜리도 아이폰 아이패드를 쥐어주면 몇 시간만에 기능을 다 알게 되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휙휙 넘긴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배우는 속도는 확실히 젊은 사람들이 더 낫다. 그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늙는 건 죄가 아니지만, 빨리 제 몫을 못해내거나 기계를 못 다루는 것은 죄악이었다.
반면에 내가 애들 엄마여서 좋은 점도 있었다. 식당에서 아이들은 환영받기 어려운 존재다. 시끄럽고 음식을 먹다가 잔뜩 흘리기도 한다. 물컵을 엎지르기도 하고 포크로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기라도 하면 마음이 같이 불안해진다.
5, 7세 정도 되는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들어온 백인 엄마가 있었다. 다른 집 엄마와 그 집 아이 1명까지 총 5명이었다. 넓은 자리가 없어서 우선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도록 했다. 한쪽이 벤치형 의자라 굳이 앉으면 좁긴 하지만 다섯 명이 앉을 수도 있다. 아이 엄마는 들어올 때부터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치원 행사가 끝나고 피곤했던 탓인지 말로는 부르지 않았지만, ‘빨리 와서 주문을 받았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바로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물을 챙기면서 테이블 쪽을 쳐다볼 때 였다. 그 엄마는 내게 다가오더니 “유별나 보이겠지만 제가 지금 너무 가슴이 뛰어서 그런데 물 한 잔만 우선 받아서 마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물을 한 잔 주자, 벌컥 들이켰다.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는 “아이들이 좀 시끄러워서 걱정되는데 혹시 크레용이나 종이가 있으면 애들 그림을 그리게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펜은 있었는데 종이가 없었다. 없다고 말하자, 엄마는 실망한 듯 자리로 돌아갔다.
그 집 아이들이 특별히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자식을 낳고 보니, 남의 자식을 쉽게 욕을 못하게 된다. 내 애도 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소리치고 떼 쓰고. ‘저런 애 엄마는 대체 누구냐’는 듯한 질책하는 시선을 당한 적도 많았다. 초보엄마는 애들이 난리를 치면 정신이 나간다. 화가 치밀어 올라 아이를 때릴 뻔 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에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그 엄마는 육아스트레스의 하루 정점에 오른 듯 했다.
바로 옆 테이블 손님이 일어나자, 나는 내 마음대로 옆 테이블을 붙여줬다. 넓게 앉을 수 있게 됐다며 아이들도 편하게 앉았다. 아이가 물컵을 잡으려다 엎었다. 그 엄마는 “죄송해요”라며 내 눈치를 살짝 살폈다. 예전 같으면 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는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영어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애가 있어요. 오늘 하루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도 알 것 같아요. 종이는 없는데 펜과 색연필은 드릴 수 있어요.”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 말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한숨인 줄 알았는데 가슴에서 터져나온 외마디 같았다. 갑자기 그 엄마는 내게 미소를 보여줬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창피한 모습을 이리저리 숨겨보려고 했는데 안도를 한 것 같았다. 일종의 연대감을 느꼈을까. 인종도 말도 다르지만 감정은 많이 비슷하다.
한 번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외식을 하러 온 중국계 가족이 있었다. 그 엄마는 예의 바른 쾌활한 사람이었다. 5세 정도 된 아이는 음식을 잘 입에 넣지 못했고 흘리는 것이 많았다. 아이의 할머니는 누가 흉볼 것이 걱정되었는지 음식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꾸 아이가 흘린 것만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손님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누군가 묻지 않으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 갑자기 그 할머니를 보니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또 바닥을 휴지로 닦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저한테 안 해주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게 제 일인데 제가 할 일을 주셔야죠.”
나이를 먹는 건 서러운 일이다. 그래도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서, 남 일에 참견하고 말 거는게 예전보다 쉬워졌다. 그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