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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자 May 26. 2024

발모광에서 러너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달렸다, 달려서 뭐하게?




습관처럼 머리를 만지고, 뜯고, 뽑는 사람. 네 접니다. 소파에 털썩 앉아 왼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잡고 만집니다. 한참 왼손 오른손 분주하다가 톡! 머리카락을 뽑는 겁니다. 톡 톡 두 개 세 개 뽑은 머리카락이 어느새 쌓입니다. 나 뭐 하는 거죠?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뽑는 강박증. 이름하야 발모광. 미친 듯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지다가 갑자기 그 머리카락을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머리카락을 만집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머리카락을 뽑았던 거죠.



발모광은 머리카락이나 털을 뽑는 스트레스성 강박증이라고 해요. 털을 뽑기 전에 불안과 긴장이 증가했다가, 뽑고 난 후 만족과 안도감을 느끼는 증세지요. 주로 허탈감, 외로움, 거절감을 느낄 때 나타나는데요. 심하면 탈모가 생기기도 하는 몹쓸 습관이지요



머리카락을 뽑으려면, 계속 손을 들고 있어야 해요. 벌서는 것처럼 팔이 아픈데도 끝까지 합니다. 머리카락을 뽑으니 머리숱도 줄어들고요. 정수리엔 늘 새로 자라나는 머리카락 때문에, 잔디밭처럼 삐죽삐죽 짧은 새 머리카락이 솟아났습니다. 하지만 새로 나는 머리카락보다 뽑는 머리카락이 더 많았죠. 저는 ‘원형탈모’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 발모광을 대체 어찌하오리까!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할 때부터 생겼던 이 몹쓸 습관은 20년째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발모광을 고치고 싶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면 어느새 내 손은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왼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지문이 사라질 지경이었으니까요! 




대체 발모광은 어떻게 고치는 건가요!

첫째, 손바닥에 STOP이라고 써놓았습니다. 행여 손이 머리카락으로 가려고 해도 손바닥 표시를 보고 다시 손을 내립니다. 


둘째, 오른손이 왼손을 혼내줍니다. 왼손을 찰싹 때리기도 하고, 손을 마주 잡기도 합니다. 왼손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안기도 했습니다. 


셋째, 벌금을 매겼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머리카락에 손을 대는지 횟수를 세보고, 한번 할 때마다 천 원씩 냅니다. 하루 2~3만 원이 걷히고 이것은 그냥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세 번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죠 내 돈!



머리카락을 뽑을 만큼 불안한 상황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요. 일, 회사 육아, 미래 등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나. 스트레스를 줄이는 게 중요했어요. 불안할 때 나오는 오래된 습관인 걸 인정하고, 머리카락을 뽑는 대신 불안한 마음을 달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죠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36계 줄행랑 달리기를 했어요 달려서 도망치면서 잡생각을 길 위에 버리고 오기로 했어요. 어차피 기록이나 건강이 목적이 아니었던 달리기.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달리기였기 때문에, 그냥 한발 두발 앞으로 뻗으면서 최대한 달릴 수 있는 데까지 냅다 도망치며 달리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빠르게 달려 나가진 않아요. 이렇게 천천히 뛰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처음엔 부릉부릉 시동을 걸어주는 느낌으로 천천히 뛰지요. 만약. 처음부터 빨리 뛰어서 심장이 요동치면, ‘아 오늘 괜히 뛰었어 그냥 소파에 누울걸.’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천히 뛰다 보면 ‘뭐 뛰는 것도 나쁘지 않네 이렇게 뛰다가 조금 더 빨리 뛰어볼까?’ 하면서 나를 달래며 길 위로 나를 데리고 뛰어갑니다.



대신 쉬지 않고 뜁니다. 걷지는 말아야지 다짐합니다. 그럼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달리다 보면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더라고요. 회사에 있을 땐 남의 의견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마음속에 담고 와, 달릴 때 하나씩 꺼내봅니다. 이 사람이 말했던 것은 옳은가. 저 사람이 말했던 것은 좋은가. 비로소 나의 기준으로 남들의 의견을 마주하고, 나의 의견까지 맞춰봅니다. 그럼 나의 기준이 세워지고 판단을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었어요.



나에게 과도하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부흥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말기로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는 최고로 잘하자고 다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껴주자고 마음먹습니다. 





달리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달리기를 하며 침묵의 시간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도망치는 내내 별별 생각을 다 합니다. 이건 달리기인지 명상인지 알 수 없었어요. 분명한 건 달리기 전과 달린 후에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좀 더 명확해지고, 좀 더 자기 자신에게 다정해졌습니다. 만약 달리지 않았다면 그냥 스트레스받고 우울하거나 머리카락을 뽑으며 유튜브나 봤을 거예요. 하지만 달린 후 명확해진 기준들을 가지고 나는 다시 내일을 살아가지요. 



이제 더 이상 머리카락을 뽑지 않습니다. 

발모광 대신 러너가 되어 세상 속으로 달려 나갑니다. 

머리카락도 지키고 내 마음도 지키고 싶으니까요.





프롤로그

-도망친 달리기가 살리는 달리기로


1부 

-술꾼에서 러너로

-발모광에서 러너로

-하비에서 러너로

-사십춘기에서 러너로


2부

-달리기 실패 계단

-뇌를 속이는 달리기

-달리기는 역시 템빨

-달친들의 뼈있는 멘트


에필로그

지긋지긋하다면 길 위로 도망치자




오늘도 달려서 뭐 하게?


https://brunch.co.kr/@folsy/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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