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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단 May 23. 2024

운동장을 달리는 소녀(feat.거꾸로)

야, 너두 할 수 있어 _01


초등학교(라떼는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는 연중 최대의 행사이자 최고의 축제이다.

그리고 그 중 이어달리기 는 운동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 중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거 다 져도' 마지막 이어달리기만 이기면 그날의 승자는 그 반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신중한 선수 선발과 연습이 필연적이었고 "그 반 계주가 누구래?" 가 한동안 이슈가 될 만큼 계주의 명예 또한 보장되었다. 

각 반의 선생님은 운동회 두어 달 전부터 빠르기로 소문 난 선수들을 선발, 각자의 기량과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춘 훈련과 코칭으로 대회를 준비해간다. 

그런데 4학년 난초반의 한 소녀가 난생 처음 거기 끼고 만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의 선입견 덕(?) 에 영예를 거머 쥔 소녀는 입을 꾹 닫고 훈련에 동참했다.

기본 달리기 뿐 아니라 바톤을 주고받는 포즈와 지점 등등을 지도를 받으며 소녀는 국대라도 된 양 뭐라도 된 양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으쓱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단지 키 때문에 뽑힌... 즉, 신장 특혜 가 문제될 만큼 특별히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진 않았다. 

소녀는 부담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D 데이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D 데이...

운동회의 모든 종목이 끝나고 대망의 하이라이트, 이어달리기 차례가 돌아왔다. 

극도로 긴장한 소녀는 손발이 얼어붙는 듯하고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다행히 소녀의 반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소녀는 온 몸의 세포들을 깨워 집중했다. 

십 여 년 세월, 모든 상념을 떨쳐버리고 오직 내게 바톤을 전해줄 전 주자에게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집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 주자가 이를 악물고 소녀를 향해 질주했고 소녀 역시그를 영접하러 몇 미터 마중을 나갔다. (소녀가 연습한 포징은 '미리 나가 받기' 였다.)

그리고 바톤을 이어 받자마자 소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온 힘을 다해... 죽어라 뛰었다.

그 순간 소녀의 머리 속엔 온통 이 생각 뿐이었다.  

'죽어도 상관없어! 빨리, 더 빨리!! 더 더 빨리!!!'

그러고 수 초가 지났을까? 소녀는 순간 낯선 대기질을 느꼈다. 

함성과 박수가 터져야 할 공간에 알 수 없는 고성과 웃음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골인 지점에 있던 담임선생님은 일촉즉발의 표정에, 고장난 로봇처럼 연신 팔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뭔가 분명 잘못 됐다는 느낌에 정신을 모아보니 선생님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거꾸로, 거꾸로, 거꾸로!!!"

소녀의 반은 꼴등을 했고 그 후, 소녀는 다시는 계주 선수로 뛰지 못했다. 

아니, 운동장에서 좀처럼 소녀를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잘하고 싶었을 뿐...


운동을 시작하고 일년 쯤 지난 즈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운동선수세요?”, “운동 오래 하셨나봐요.”, “몇 년이나 하셨어요?” 등등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형미인에게 ‘원판 본성’ 이 나오듯 과장된 겸손으로 손사레를 치곤 했다. 

“아니에요. 일 년 밖에 안됐어요.”, “아직 배우는 중이에요.", "헬린이랍니다.”

그리고 그런 답을 들은 이들은 한결 같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마다의 추측을 이어 갔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겠지, 운동 신경이 좋아 보인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있는 거다, 근육이 잘 생기는 체질이네... 등등.

한마디로 넌 원래 몸 좀 쓰는 애잖아 라는 소리다. 

하지만 운동장을 거꾸로 돌던 사십 년 전 그때, 난 깨달았다. 

난 머리 쓰는 것도 못하지만 몸 쓰는 건 더더욱 못하는 둔하디 둔한 인간이라는 걸...

그리고 그날 이후, 워낙에 밖에서 뛰어놀기보단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걸 좋아했던 나는 더더욱 나가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반(反)운동적 인간 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중학교 조회 시간에는 종종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양호실 VVIP룸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병약, 그 자체였고 고등학교 때는 수험생 특권으로 늘어난 뱃살에 교복 치마 단추는 3년 동안 봉인 해제였다. 

학력고사에 필수항목인 '체력장' , 그 중에서도 오래 달리기는 아직도 내게 군대 행군 급으로 끔찍한 공포와 증오로 기억 돼 있다.  

수학보다 체육 시간이 더 싫었고 어떻게든 그 시간을 땡땡이 치려 주번을 매수하기도 할 정도였지만 불행히도 나의 고교는 전국 랭킹 농구부 덕에 체육과 수학의 내신 비율이 같을 만큼 체육에 진심이었다.

매 학기 마다 체육 실기는 내게 공포와 스트레스였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결과는 ‘양’ 아니면 ‘미’...

남들은 떨어진 수학 성적을 체육으로 메꿨지만 난 동반자살이었다.

그 이후로도 꼬박 삼십 년을 틈만 나면 소파에 누워 시체놀이를 하며 연중 355일을 동면하는 곰처럼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며 살아왔다. 

방광이 터지나, 내가 일어나나 보자며 쓸데없는 '겨루기' 를 한 정도를 빼고는 말이다. 


그런데 이랬던 내가 지금 운동이 어쩌니, 근육이 저쩌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간혹 머슬대회에 나가라는 추천도 듣고 트레이너가 되어달라는 부탁도 듣는다. 

운동과는 죽을 때까지 친해질 수 없을 거라, 아니 친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말이다. 

msg 아니냐구? 드라마 에피소드 아니냐구?

"어떻게 거꾸로 뛸 수가 있어?"

당시 6학년으로 가장 열렬히 조롱했던 운동회 현장에 있었던  막내 오빠를 걸고 팩트인증한다. 

그러니 나의 과거와 본성을 의심하지 말라!

현재 나의 변화와 성장도 의심하지 말라! 

누구보다 내가 더 얼떨떨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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