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_02
종편의 각종 건강프로그램과 환상의 콤비인 홈쇼핑 건강식품, 그리고 주변의 일가친척, 선배, 지인들에게서... 정말 흔하게, 수없이 들은 얘기다.
바로 '갱년기 괴담'.
그 중 한 겨울에도 손수건과 부채를 가지고 다니며 '열이 나 미치겠다' 며 요란을 떨던 한 선배 작가가 떠오른다.
결혼도 안 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방송한 것도 없는데 (당연히 벌어놓은 돈은 커녕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인) 어쩌다 보니 갱년기와 마주해버린, 출가한 형제들 사이에 홀로 남은 어머니와 살며 여행 한번 맘놓고 가보지 못했다 푸념하던 그 작가님...
백옥 같은 피부에, 이목구비까지 주장이 뚜렷해 꼭 러시아 인형을 닮았는데 그 흔한 남편이나 남친도 없어 볼 때마다 '인물이 아깝다' 라는 생각이 들던 그 선배가 '갱년기 땜에 못 살겠다' 며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할 때면 내심 안타까움과 연민이 밀려들어왔었더랬다.
그러면서 더 내심으로는 '그것은 남의 일이고 먼 세상 일' 이라며, 근거 없는 자심감 혹은 안심으로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것이 찾아왔다. 오밤 중에도 속옷이 쫄딱 젖을 만큼 땀이 났다 금방 추워졌다 해서 한 겨울에도 에어컨을 틀고 잤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잤다, 난리를 친다는 불평과 더불어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남친과 하루하루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한발 더 다가간 느낌까지는 있었다.
평소 내 생활이나 식습관은 건강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 '갱년기 괴담' 은 게으름의 아이콘인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만은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근육을 만들고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어느 정도 건강에 자신이 생겼고 달거리도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기에 웬지 모르게 갱년기 따윈 내 역사에 없을 줄 기대했다.
무근본 논리이지만 미혼에 출산 경험이 없다는 게, 나의 '여성성' 을 희석시켜주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보상심리(?) 같은 거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 전 나에게도 '그놈이 쳐들어오고야 말았다!'
처음엔 몸살이 난 줄 알았다. 자다가 후끈 열이 올라 무슨 일이지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말짱해진다.
안 당해보면 모른다. 밤 사이,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데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처음엔 믿겨지지 않아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이젠 땀까지 촉촉하게 배어드니, 빼박이다.
그러다 보니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 옷을 벗었다가 입었다가 하고, 왜 그렇게 화장실은 자주 가고 싶은지...
삶의 질이 훅 떨어졌다.
이 역시 호르몬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혹씩 들었던 감상적인 생각이 물 밀듯 밀려온다.
어쩌다 이리 홀로 갱년기를 맞이해버렸을까, 같이 싸울 사춘기 자식 하나 없이...
그렇다고 싱글로서 자랑하거나 추억할 만한 화려한 연애사를 남긴 것도 아니니...
여자로서 사는 게 그리 유쾌하거나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자의 삶을 동경한 것도 아닌데, 이왕 태어난 거, 여자로서 기능을 '써보지도 못하고 폐기 당하는 기분' 이 드니 조금은 후회도 된다.
내가 안타까워했고 연민했던 그 선배도 이토록 쓸쓸하거나 씁쓸했을까?
부디 이 전쟁을 무사히 끝내고 지금쯤은 평온과 안락을 누리고 계시길...
그러나 나는 그 놈에게 맥없이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길 지는 모르겠지만 맞서기는 할 것이다.
그 동안 여자로서 소비한 것들 (생리대 포함) 대신 이제는 인간으로서 혹은 더 큰 범주로는 동물, 생물로서 소비할 것이고, 여전히 몸을 움직이고 단련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며 '자연인' 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이 참에 여성으로 태어나 완경까지 이르른 모든 이에게 경외와 찬사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