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두 할 수 있어_12
작년에 이어 두번째 YMCA 마라톤...
네팔에서 돌아와 시차적응에 실패해버린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헌나라의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한 달 여의 루틴 속에서 아침 7시 소집, 8시 대회는 완주나 기록보다 더 큰 난관이었다.
평소와 다른 수면패턴은 역시나 '구 불면증 환자' 의 습관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새벽 3시, 4시, 5시가 되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5시가 넘어갈 즈음엔 작년 첫 마라톤에 '흑백요리사' 를 보며 밤을 새버렸던 악몽이 떠오르며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며 이번에도 포기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새벽 6시가 넘어 알람이 울렸고 한시간이 채 안되지만 깜빡 잠에 들었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약 3분 간 고민을 하다 일단 짐을 챙겨 나갔다. 나가서 뛰다 포기할 지언정, 메달이랑 간식은 받아오자라며 허둥지둥 대회장으로 갔다.
그러나 막상 광화문 일대를 어슬렁거리는 '달리기 유령' 들을 보자 욕심이 났다.
기록은 포기하더라도, 일단 뛰자. 뛰어보자!
막상 출발선에서 동료이자 경쟁자들 사이에 서니 각오가 남달라진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초집중을 하게 된다.
같이 달리자며 옆에 꼭 붙들어 맨 크루가 보이지 않자 에라, 모르겠다... 냅다 버리고 도망치듯 앞서 간다.
속도를 내고 호흡을 조절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앞지른다.
추울 거라 해서 긴팔을 입었는데 열이 오르고 땀이 차서 힘들어진다.
지퍼로 된 점퍼에 배번호를 붙여놔서 벗기가 까다로운데 순간 고민을 하다 행동을 개시한다.
배번호 떨어질 새라, 조심조심 옷핀을 열고 닫는데, 뛰면서는 안되겠다.
잠시 서서 정비를 하는데 내 소중한 20초 혹은 30초가 흘러간다.
문제는 1분도 안되는 그 순간의 멈춤이 다음 달리기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가속도의 법칙이냐, 관성의 법칙이냐,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이냐?
거기다 시련이 하나 더 나타난다. 벗자마자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거!
전날 비가 왔고 대회 당일도 눈비를 예상한 날씨...
그야말로 '바람을 가르고' 달린다. 추위를 떨치기 위해 조금 더 속도를 내보면서...
그러나 역시나 마의 구간 7km 에 이르자 힘에 부친다.
청계천 구간에서 반환점을 돌아오는 맞은 편 주자들을 보며 반가웠지만 가도 가도 반환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만 좀 나오라고!!!
대상 없는 그 무엇에게 원망을 해보지만 그래도 반환점은 이번 다리도 아니고, 이번 다리도 아니다.
이제는 하나 둘 나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따라잡고 싶지만 다리가 싫단다. 그만 멈추고 싶단다.
가야할 길이 왔던 길보다 짧으니, 가긴 가야겠는데 또 포기한들 어떠하랴, 벌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상금을 타는 것도 아닌데... (물론 상위권 상금은 있지만)
셀프 가스라이팅으로 버틴다.
이거 완주 못하면 벌금 천만원. 아니 1억!
그래도 힘들어. 그만 하고 싶다.
여기서 멈추면 평생 달리기 못함!
머리 속엔 다리 부러져 철심 박고 수술해 한달 누워있다 몇 달을 깁스로 다녔던 시절, 억지 회상 돌리고...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고...
이거 완주 못하면 평생 맥주 못마심!
하얗고 차갑게 얼음 낀 잔에 생맥주가 아롱거리다보니 피니쉬 지점이 거의 다 온 것 같다.
저 코너만 돌면... 이를 악물고 속도를 내본다.
드디어 피니쉬!!!
불면과 강풍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작년보다 20초를 단축해 무사히 완주를 했다.
짜릿하고 상쾌하고 날아갈 듯 가뿐하다.
그 중 수많은 '번뇌와 유혹' 속에서도 '결국 해내는 사람' 이라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큰 선물로 다가온다.
다음 달 서울신문하프마라톤에서는 잠도 잘 자고 옷도 잘 입고 가서 더욱 만끽하고 오리라!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원대한 꿈' 이 생겼다.
지금은 10Km 이지만 내 환갑에는 '잔치' 대신 '보스턴 마라톤' 에 출전하는 것이다.
물론 42.195 Km 풀코스 밖에 없고 완주 경력이 있어야 신청 가능하고 신청해도 뽑힌다는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멋지지 아니한가? 불가능을 향한 꿈이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