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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그리고 마흔, 제주

20여 년간의 제주 여행기

by 두어썸머

2002년 가을:

나의 첫 번째 제주도행은 가을의 수학여행이었다.


첫 번째 제주여행을 떠올리면 언제나 운동장에 서있는 나를 떠올리게 된다. 제주도로 출발하기 전, 모두 운동장에 집합해서 선생님의 말씀을 다 같이 듣는 모습. 하지만 선생님에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잔뜩 신이 난 내 모습.


보통 오래 전의 여행을 떠올리면 여행지에서의 추억들이 사진처럼 몇 장씩 스쳐 지나가는데 첫 번째 제주여행만큼은 옷차림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점을 통해 그때 나는 외모에 한창 신경 쓸 나이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날 난 빨간색 민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분홍색과 남색이 섞인 새 운동화를 신었었다. 수학여행에 신을 거라고 운동화를 새로 샀는데, 한라산의 현무암을 쉴 새 없이 밟으며 새운동화가 너덜너덜해져서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열일곱에 올랐던 한라산이 내 인생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이유다. 지금은 길이 많이 좋아졌겠지만 그땐 아주 험준했다. 보이지 않는 정상을 향해 끝도 없이 울퉁불퉁한 현무암을 밟았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서 20여 년이 넘도록 다시 등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축복 중에 하나라는 망각 덕분에 조금씩 다시 올라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다. 아들이 열일곱이 되기 전에는 한 번쯤 더 올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7년 남았다.


2007년 봄:

두 번째 제주도는 대학생 때 답사 여행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가을에 떠났던 수학여행과는 달리 봄이라서 또 다른 느낌이었던 제주도. 꽃이 만발했고, 답사 내내 화창했으며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딱히 강렬했던 기억이 없는지 사진으로 봐야 알 수 있는 추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다. 녹차밭, 풀향기와 꽃향기 눈부신 햇살 그런 것들이 떠오르는 여행.


2015년 겨울:

그리고 결혼 직후 엄마와 여동생과 셋이 떠난 여행이 세 번째 제주도 여행이다. 아빠와 남동생을 제외하고 여자들 셋이서만 떠난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다. 여동생과 달리 난 엄마와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 단둘이서는 한 번도 어딜 가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여동생은 엄마와 단둘이서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다. 여동생 덕분에 내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기도 하다. 아들과 달리 딸은 커서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여전히 친구 같지도 살가운 딸 같지도 않은, 조금 멀리 사는 이름만 딸인 그런 딸로 사는 중이다. 딱히 속을 썩인 적도 없지만 크게 기쁘게 해 드린 적도 없는 그냥 보통의 딸이랄까.


세 번째 제주도 여행을 떠날 땐 가정을 이룬 지 한 달이 막 지난 새댁이자 엄연히 30대가 시작된, 사회적으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엄마와의 여행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대부분의 계획을 엄마가 세우셨고 운전도 엄마가 하셨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동생은 아직 10대였지만 나는 30대인데 왜 그랬을까 싶은 그런 여행. 내 나이가 몇 살이 되든 엄마 옆에선 여전히 나도 어린아이가 되는 모양이다. 나는 남들보다 더 쉽게 추억을 잊는 건지, 이 여행에서의 기억도 몇 조각만 남았다. 함께 갔던 식당도 관광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귤 따는 체험을 했던 것과 머물렀던 숙소들이 떠오른다. 서귀포에서 머물렀던 숙소는 통나무로 된 집이었는데 넓고 쾌적했으며 따뜻했다. 뒤에는 귤을 딸 수 있는 체험장과 산책로가 있어서 아침에 산책도 하고 귤도 따먹었다. 그리고 성산 쪽의 꽤 괜찮았던 호텔. 가격이 상당히 저렴했는데 내부가 깨끗하고 뷰가 상당히 아름다웠다. 커튼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저 멀리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다와 더불어 네모나게 솟아오른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그 풍경. 아침에 성산 일출봉 뒤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감탄했던 게 생각난다. 그곳에 다시 찾아가고 싶지만 숙소 이름을 까먹어서 아직도 다시 가보진 못하고 있다. 언젠간 가볼 수 있을까 싶은데 어쩌면 숙소가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도는 갈 때마다 무언가 사라지고 무언가 새로 생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 숙소가 그립다기보다 엄마가 좀 더 젊으셨고 내가 어렸던 그때가 그리워서 가보고 싶은 걸 수도. 그렇게 몇 장의 기억으로 남은 조금 더 젊었던 세 번째 제주도.


2019년 겨울부터 2025년 여름까지:

그리고 네 번째 제주도 여행부터는 내내 아이와 남편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시기에 해외로 떠나지 못하고 국내여행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시기에 다시 제주도를 찾았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이제 몇 번을 떠났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가는 곳. 매년 여름, 어떤 해에는 겨울에도 제주도를 찾고 있다. 갈 때마다 새로워서 더 좋아지는 제주도.


예전엔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게 좋았는데, 이젠 익숙한 곳에서 새로움을 찾는 게 더 좋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곳이 가까이에 있어서 행복하다. 여권을 챙겨야 하고 환전과 로밍의 귀찮음도, 액체 100ml의 제한도 없는 그저 가볍게 바다만 건너가면 되는 섬. 모든 것이 내가 사는 곳과 같은데 풍경만 다른, 새로우면서도 편안한 곳이 비행기로 1시간 거리라니.


게다가 동서남북으로 다른 매력을 가진 바다가 수도 없이 많이 있고 매력적인 카페와 식당들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이 섬은 내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섬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 같은 계절이라도 장소마다 다른 풍경,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여행의 기분과 감정. 가장 큰 건, 서서히 변하는 내 나이와 마음가짐.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다르기 때문에 어딜 여행해도 늘 새롭게 느껴진다. 제주도가 아니라 그 어떤 곳이라 해도.


하지만 제주도가 더 특별한 건 같은 화폐와 같은 언어로, 하지만 육지와는 매우 다른 특별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멀리 펼쳐지는 녹음 또는 설경. 이번 여행도 올해의 초록은 다 보고 왔다 싶을 정도로 짙고 연한 녹음을 실컷 보고 왔다. 도로 옆으로 울창하게 이어진 풀숲, 그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말들과 초록과 어우러진 회색빛의 돌담만 보아도 여기가 제주구나 하는 감탄과 동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제주도는 좀 더 신경 쓸 게 많다. 딸로, 친구로 떠난 여행이 아닌 엄마로 떠나는 여행은 아무래도 더 그렇다. 아이의 컨디션을 살피는 것과 더불어 아이와 함께 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것도 내 몫이다. 챙겨야 할 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어떤 여행도 기내용 캐리어 두 개로 끝내는 편이지만 아이가 미취학 유아였을 땐 튜브에 구명조끼까지 챙겨야 해서 여름 여행임에도 짐이 많았다. 지금은 수영도 잘하고 모든 음식을 잘 먹어서 예전보다 짐이 훨씬 가벼워지긴 했다. 수영은 배워두면 평생 좋을 운동이기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우게 했는데 여행지에서 확인해 보는 아이의 수영실력은 그동안의 강습이 돈 아깝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다. 나도 학창 시절에 배운 몸의 기억으로 어설프게 수영을 해보지만 자세가 엉망이라는 아이의 평가에 올여름엔 수영강습을 듣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하지만 매일 러닝하기도 바빠서 수영은 등록하지도 못하고 또 내년 여름이 훌쩍 와버리겠지. 물에 빠져 죽지 않을 정도면 됐다는 나름의 판단도 있지만 말이다.


제주에서의 러닝은 낭만적이다. 그저 풍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여행 와서도 달리는 내 모습’이 좋아서이다. 여행지에서도 러닝을 빼먹지 않고 해야 스스로 ‘러너’로 인정할 수 있다. 러닝 3년 차이지만 이제야 ‘러너’에 가까운 사람이 된 것 같다. 올해의 제주도는 러닝, 그리고 어설픈 수영으로 마치 전지훈련 같은 여행이었는데 체력이 좋아져서 그런지 크게 힘들지 않은 여행이었다. 10대에 접어든 아이의 발랄함과 더불어 40대가 된 나와 남편의 심적 여유로 인해 (경제적 여유까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파란 여행이었다.


열 번도 더 넘게 떠난 제주이지만 아직 한 번도 떠나지 못한 제주도 여행은 ‘나 홀로 떠나는 제주’이다. 언젠간 한 번쯤은 그런 여행을 꿈꿔본다. 오롯이 혼자서만 느끼는 제주는 또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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