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다. 달라진 바람결을 맞는 게 그냥 좋아서 우두커니 있게 된다.
여름 샌들을 신는다고 발라둔 매니큐어는 저만치 밀려나 있고, 작년에 심은 부추가 올해는 심지도 않았는데 몇 포기 자라 있다. 그중 한 포기가 우뚝 솟아 씨앗을 맺어 놓았다. 여름내 지푸라기만 남겨놓더니, 그새 가을해가 달라졌는지를 알고 실오리 같은 달래가 수북이 자라 있다. 겨우 한 포기 성공한 들깨는 여름동안 몇 장의 깻잎을 맛볼 수 있게 해 줬다. 지금은 하얀 꽃들이 피어나고 들깨가 솜솜 박혀있다.
몇몇 유럽국가는 가도 가도 산이 안 보이는 지역들이 있다. 평야만 펼쳐져있고, 숲만 있다. 산이 없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산도 있어야 하고, 바다도 있어야 하고, 바다가 없으면 호수라도 있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 내가 '설악산'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온 사방이 산으로 연결되어 있고, 암벽이 높이 솟아있어 멋진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어느 계절이라도 찾아간다. 목초지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옛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산의 아랫부분을 깎아서 관리해 온 목초지는 어디를 지나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에 사는 소나 양들은 그래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해 본다. 가축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풀을 뜯으며 길을 다져놓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같은 길 위로 걸었던지, 땅은 단단하고 작은 오솔길이 그 위에 나 있다. 강한 태양 아래 땅은 쩍쩍 갈라져있고, 그 위의 풀마저 서걱서걱 밟히는 소리는 가을이 오는 소리 같다.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다. 여기저기 와닿는 해가 마치 필터를 끼워놓은 것처럼 부서진다. 가을빛이다. 서늘한 바람이 풀 사이로 지나가고, 마른 풀냄새를 풍겨준다. 높은 곳으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파도가 부딪치는 바다에 있는 것처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사진을 찍어보면 안다. 나도 모르는 표정주름들이 생기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도 모른다. 딸아이가 손으로 미간을 펴주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보면 내가 이곳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다. 주름은 퍼져있고, 얼핏 이십 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신기하면서도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 가을이 주는 빛의 선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