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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Anne Feb 28. 2023

결혼 독립 기념일



오후에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학교 가방을 메고 따라오면서 재잘댄다.
" 오늘 장갑을 깜박하고 안 갖고 갔어. 그런데 야스민카가 빌려줬어. 내가 좋으면 자기도 좋대, 내가 한쪽이라도 줄려고 했는데 괜찮대."
9살의 어린 친구는 눈이 와서 시린 손을 참으면서도, 이런 말을 딸아이에게 해줬다.


나는 이 말을 언제 해 보고는 멈춰버렸는지, 또 이런 말을 해 주던 나의 남편은 더 이상 왜 이 말을 들려주지 않는지, 긴 여운을 남긴다.




리는 사랑만 하면 되었다.
사랑하는 타인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그리고 사랑을 공유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랑은 차라리 쉬운 거였다.

삼십 대 후반의 우리는 변하고 말았다.
사랑은 깊고 어두운 바닥으로 가라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점점 지쳐갔고,
남편은 홀로 짊어진 경제적 압박감에 발버둥을 쳤다. 우리는 서로 자기가 제일 힘들다며 싸움질만 해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사라졌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끊임없이 미워했다.

모두 다 내 탓이었다.
20대의 나는 많이 부족다.
겨우겨우 포장했다.
그런데 나는 결혼 후, 알맹이 없는 빈 껍질을 금방 보여주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그런 나의 모순까지도 사랑해 줄 거라 굳게 믿었다.


힘이 들었다.

우울했다.
맑고 앳되던 나의 생기가 어느 날, 증발해 버렸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성장이었다. 사랑과 욕망, 질투, 불안은 사람을 파멸시킨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나를 가두고 있는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모두 다 성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 성장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노랑 애벌레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 그럴 리가 없어요! 제 눈에 보이는 것은 당신도 나도 솜털투성이 벌레일 뿐인데, 그 속에 나비가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과는 다르단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일단 나비가 되면, 너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사랑 말이다. 그런 사랑은, 서로 껴안는 게 고작인 애벌레들의 사랑보다 훨씬 좋은 것이란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 [꽃들에게 희망을] 中 - 트리나 폴러스




우리는 오래전부터 하나였다.
내가 웃자, 그도 웃게 되었다.
내가 행복해하자, 그도 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다만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나는 작년부터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더 이상 남편과의 파티만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간 결혼 생활을  버텨낸 나를 자축하기 시작했다. 감성적인 내가 지극히 이성적인 남편을 만나 , 성장해 가는 인간적인 독립이 기특했다.

나에게 결혼기념일은, 결혼을 함으로써, 결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한 인간이 성장할 기회를 얻은 날이다. 결혼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매년 나의 나지막한 결혼독립만세가 내면에서 점점 크게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미숙했던 20대의 남, 여가 만나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그와 함께 때로는 로라도, 날아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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