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콩쿠르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그가 쓴 글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음악을 통한 기쁨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고마웠고, 모든 댓글에 시간이 날 때마다 답글을 달 거라고 했다. 그의 글은 정직했고, 마음이 담겨있어서 또다시 여운이 느껴지는 하루가 되었다.
지난 10월은 별 것 없는 내 일상에 설렘이 있었고, 기다림이 있었다. 바쁘지도 않은 내 일상의 달력에 아주 중요한 스케줄들이 메모되었다.
3차 라운드에 진입한 그가 연주한 첫 번째 곡은 쇼팽 변주곡 Op.2이었다. 이 곡이 주는 느낌이 너무 맑고 순수해서 계속해서 듣게 되었다. 진지하면서도 가벼운, 즐기는 듯한 그의 연주 자세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투명한 마음이 화면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다.
3차 라운드를 마친 이혁 피아니스트는 너무 기쁘고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파이널을 앞둔 마지막 라운드에서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쇼팽이 17세 때 작곡한 맑고 밝은 느낌의 곡을 선택해 자신이 3차 라운드에서 연주하는 기쁨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국제 콩쿠르는 개인적인 목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랫동안 힘들게 준비한 것들을 온 힘을 다해 내보여야만 한다. 더군다나 18회 쇼팽 콩쿠르는 코로나로 1년이 연기되어 6년 만에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연주자는 청중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한 인터뷰가 참 마음에 든다. 정말 개인 연주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피아노 소리가 좋아 그냥 들었다.
아무것도 몰라도 뭔가가 느껴지면, 나는 좋았다.
가슴이 찌릿하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21살의 이 혁 피아니스트의 표정은 너무 무덤덤했다. 다들 많이 긴장하고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빈 틈이 보였다.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그가 먼저 보여주였다. 그 빈틈에 나를 안착시켜놓았다. 뭔가가 내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결승에 진출했다. 까다로운 심사기준은 모르지만, 내가 느낀 그 마음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졌다.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만 남겨놓았다. 쇼팽이 19살 때 2번을 20살 때 1번을 작곡했다. 먼저 작곡한 곡의 출판이 늦어져서 2번이 되었다.
쇼팽은 친한 친구에게 "나는 내가 진심으로 숭배할 수 있는 이상형을 찾았다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살 때 만난 첫사랑 콘스탄치아를 생각하며 두 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소심했던 그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고, 그녀 또한 쇼팽의 사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약 190년 전의 섬세하고 예민했던 그가 짝사랑에 대한 애틋함, 아름다움, 사랑의 마음을 청년의 순수한 감성으로 담아냈다.
파이널 리스트가 발표되고, 일정이 정해졌다.
12명의 파이널리스트 중에서 3명의 연주자만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2번을 연주해서 우승했던 피아니스트는 1927년 쇼팽 콩쿠르가 생긴 이래 1980년, 딱 한 명뿐이었다. 나는 이혁 피아니스트가 2번을 선택한 이유를 알 듯, 모를 듯했다.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 1 라운드 하고는 다르게 점점 열기가 더해간다.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관중들, 유튜브 댓글은 실시간으로 다양한 언어로 계속해서 올라왔다.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건반 위로 그의 땀방울도 솟구치며 다시 튀어 오른다.
그의 의도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즐기면서 연주하고자 했던, 청중들과 그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했던 그였기에 수상이 어려운 2번을 선택한 21살의 그가 참 용감해 보였다. 가장 이기적이어야 하는 순간에도 연주자의 삶을 살아가려는 그의 기본에 충실한 마음이 참 높아 보였다.
곡이 끝날 때마다 팔을 뒤로 젖히는 동작은 우아했고, 피아니스트는 손수건으로 땀도 기품 있게 닦는구나, 싶었다.
그의 미수상이 아쉽지는 않다. 그는 계속해서 바이올린과 체스를 즐길 것이며, 러시아에서 학업을 이어갈 것이고, 그만의 음악을 계속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의 새로운 낭보가 전해졌다. 12월 7일 폐막한 제17회 프랑스 아니마토 콩쿠르에서의 우승 소식이다.
이 콩쿠르는 쇼팽 작품으로만 연주된다.
그는여전히 그만의천진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나도요란스럽지 않은 조용한 축하의 미소를 건넨다.
참고로 18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는 캐나다 출신 '브루스 류(24)'이다.
그는 " 아직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라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꾸준히 피아노에 '일상'을 '헌신'하고 싶다" 고 말했다. (2021.11.18 문화일보 기사 中)
'일상'을 '헌신' 하고 싶다는 말이 멋지게 생각돼서 적어본다. 나에게는 그 무엇이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