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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Feb 04. 2024

베를리너들의 제멋대로 새해맞이

독일의 새해전야(12월 31일)는 실베스터(Silvester)라고 불린다. 독일에서는 1월 1일뿐만 아니라 실베스터 역시 공휴일이다. 지난해 실베스터에는 초록이네 사촌 마크네 집에서 열리는 하우스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마크는 여자친구와 지난여름 베를린의 중심가인 미테, 옥상 테라스가 딸린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삶을 시작했다 (동거를 시작했다는 말은 왜 이렇게 쓰기 싫을까). 여름에 아주 잠깐 그 집에 놀러 갔을 때 테라스에서 펼쳐지는 도시 전경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곳에서 실베스터를 보내면 정말 제대로일 것 같았다. 베를린의 실베스터는 밤하늘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 12월 31일 베를린은 여느 때와 다른 긴장감과 설렘으로 넘친다. 독일 대도시에서는 실베스터부터 새해 새벽까지 불꽃놀이를 하는 (비교적 현대의) 풍습이 있는데, 베를린에서는 꽤 큰 불꽃판이 벌어진다. 한국의 여의도 불꽃축제처럼 어떤 한 주최기관이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 철저히 기획하여 밤하늘을 수놓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에서는 서로 합을 전혀 맞추지 않은 시민 개개인이 하늘로 쏘아 올리는 불꽃이 도시 전체를 뒤흔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실상 새해전야 전날인 30일 낮부터 서막이 시작되는데,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펑! 펑! 굉음이 들려오고 길가엔 버려진 폭죽 껍데기가 널려있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베를린에서 처음 연말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공식 행사가 아니니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나는 지를 알 수도 없다. 밤새 폭죽을 쏘아대도 항의하거나 민원을 넣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이 소음이 해넘이의 상징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확실한 것은 정확히 새해 0시가 되면 소음과 불빛이 절정에 달한다는 것이고, 이 날은 푹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불꽃놀이 대잔치는 마크네 집처럼 탁 트인 전망이 있는 곳에서 감상하면 즐거운 쇼가 되지만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폭죽 소리만 들어야 한다거나 다 무시하고 얌전히 잠이나 자야지 하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소음 테러가 된다.

1월 1일 0시 0분, 새해를 축하하며 포옹하는 친구들

이번 실베스터가 특별했던 이유는 이 불꽃쇼를 베를린 한복판의 옥상 테라스에서 보며 새로운 감상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면 늘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시간이 늘 그렇듯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한다는 일,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월 1일이 시작됨을 축하하려고 도시 곳곳 각자의 위치에서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얼굴 모를, 이름도 나이도 모를 동시대 사람들의 존재가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는 날은 실베스터가 유일할 것 같다. 그러니까 늘 자기 개성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르르 남들을 따라가는 걸 거부하던 사람들이 실베스터엔 (물론 나름의 무질서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이날 새벽은 또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초록이와 챠챠와 함께 (마크네 커플과 그들의 친구들 사이에 껴서) 보내며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자정이 지나고 밤하늘의 불꽃은 계속되었지만 테라스는 너무 추워 모두가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마크의 친구 중 한 명인 레나가 꽤 술이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거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춤 출래?’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이들을 처음 만나보는 챠챠는 수줍어 거절했지만 나는 ‘나 완전 춤추고 싶었어!‘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거실 한편에서 작은 클럽이 열렸다. 레나의 남자친구는 이미 말없이 그리고 쉼 없이 혼자 춤을 시작한 상태였고, 내가 뻔뻔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자 평소엔 점잔을 떠는 초록이까지 흥을 견디지 못하고(?) 합류했다. 레나는 다른 이들을 꼬드기러 다시 떠났고, 곧 수줍은 챠챠까지 설득되어 클럽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손님을 확보한 레나는 이제 우리와 함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춤추는 이 친구들이 너무 귀여워 행복할 지경이었다. 모두가 최악의 춤실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작이 얼마나 멋지건, 보는 이가 어떻게 느끼건 말건, 그냥 제 멋에 취해 몸을 흔들고 사지를 흐느적거리는 이 친구들. 진짜 클럽처럼 춤실력을 가려줄 조명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이렇게 귀여운 난장판 속에서 2024년을 맞이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이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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