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언어적 소수자로 살아가기
독일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보는 날은 호사를 누리는 날이다. 베를린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본 날도 그랬다. 상영관에서 나는 자막이 필요 없고, 영화 대사 중 모든 농담과 냉소와 절묘한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원어민’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독일에서 독일 영화를 보러 가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모두 캐치하지 못해 때때로 어리둥절한 상태에 있는 언어적 약자가 된다. 어쩌면 영화관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모험일지 모른다.
특히 영화의 여주인공 서래를 보며 나는 가족과 떨어져 독일에 사는 내 자신의 입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중국인인 서래는 한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국어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주로 사극으로 한국어를 배워 말투가 어딘지 어색하다. 서래의 남편이 죽고 서래가 용의자선상에 오르는 것이 영화의 초반부 내용인데, 서래는 경찰서에서 남편과의 관계를 묘사하던 중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라는 대사를 던진다. 서래는 ‘마침내’라는 단어가 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뉘앙스를 가지는 지 알까, 모를까. 그의 모국어가 한국어였다면 경찰은 단번에 ‘마침내라니, 당신은 전부터 남편이 죽기를 원했군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는 서래의 모국어가 아니다. ‘마침내’가 서래의 범행동기를 비춰주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의 부족한 한국어 실력을 보여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때 내가 독일의 경찰서에 가서 어떤 사건의 증언을 하는 상상을 했다. 부자연스러운 단어 하나, 문법적인 실수 하나 때문에 의심을 사게 된다면? 미묘한 어감 차이 때문에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면? 모국어의 수준으로 내 자신을 완벽하게 변호할 수 없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독일어와 영어로 의사 표현은 가능하지만 능청 떨기, 비유, 설득이나 거짓말 같은 건 한국어로 가장 잘한다. 어휘가 풍부해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가 체득되어 있고 한국식 사회생활 법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국에서 외국어를 쓰며 산다는 것은 이런 고급 사교 스킬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 언어 핸디캡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언어, 이건 팩트다.
하지만 내가 독일어나 영어를 쓰며 느끼는 해방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외국어로 나를 표현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다. (독일 경찰서에 갈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서양 언어에서는 나이와 호칭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 외에 생각해 볼거리가 좀 더 있다. 다른 언어를 쓸 때 대화의 결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느끼게 된 계기가 있다. 베를린에 눌러앉기 전, 공무원이던 나는 막연히 독일 어딘가에서 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베를린은 독일에서도 가장 국제적인 도시이면서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알려진 곳이라 유력한 후보지였다. 그래서 베를린이 내게 잘 맞는 도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열흘 간 휴가를 내고 베를린 여행을 했었다.
그때 베를린 여행에서 에어비앤비 호스트, 밋업(meetup)이라는 모임 앱을 통해 만난 사람들, 심지어 길에서 만난 누군가와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퇴사하고 싶지만 확신도 대안도 없어 갈팡질팡하던 상황이었다. 그땐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했으니 영어로 이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점은, 이들의 관점에서는 내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직장이 안 맞으면 퇴사하면 될 일.
그런데 내겐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베를리너들에게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그림을 묘사해주어야 했다. 고작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웠고, 공무원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이따금씩 유럽여행을 다닐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는 고된 노동, 적은 휴가 일수와 눈치 문화가 표준인 것, 그러니 별다른 기술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은 한국에서는 미친 짓이라는 점 등 같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사정을 몰랐던 외국인들은 경악했고 나는 ‘내가 비정상인 거 아니구나’ 안도했다.
베를린 여행을 계기로 나는 우리 언어, 우리말 대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표현들과 생각 없이 혹은 예의상 주고받던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눈치 보여서 어떤 것을 못하겠다’거나, ‘철밥통이니 버텨야 한다’와 같은 표현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가진 것처럼 쓰이지만 잘 따져보면 이런 것들,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문장을 비한국인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면 확연해진다. 눈치를 보는 건 언제나 아랫사람이니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불공평하다. 그러므로 눈치가 어떤 행위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철밥통이 어떻게 개인의 적성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가. 안정적인 직업이 곧 최고라는 등식은 사회가 개인의 실패에 따른 불행과 불편함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시스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치나 철밥통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증거다.
한국의 내 생활 반경에서는 ‘공무원 = 철밥통 = 즉 6년 만에 퇴사는 미친 짓’이라는 엉성한 등식만 되풀이될 뿐 그 너머의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등식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여유가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없었다. 우리말에는 어떤 주제건 사회적 등식이 존재했고 그걸 벗어나는 대화는 껄끄러웠다. 한국에서 착한 아이, 개념 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스맨이 되어야 했고 진심보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면서 내 진심이 뭔지 나도 모를 정도로 내 언어는 피상적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말은 오가지만 교감은 없는 그런 환경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좌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베를린 사전 답사는 내게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사직서를 냈다. 퇴사 후 다시, 이번엔 훨씬 많은 짐을 가지고 날아온 베를린에서 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년 후에는 대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엔 천국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독일 사회도 관료주의와 느리고 불친절한 아날로그식 행정 서비스 등 나름의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 정치도 안정적이고, 빈부격차도 없고, 기후도 온화하면서 사람들도 친절한 그런 나라는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언어 환경이 좋았고 여전히 좋다. 처음에는 언어장벽 앞에서 내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진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를 통해 내 모국어와 내 사고방식을 더 잘 비춰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려움을 다 잊게 해 줄 만큼 큰 보람이었다.
언어를 하나 더 할 줄 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비한국인 친구들과 한국 사회와 정치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우선 그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이 주제의 전문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오래 일하는지, 회식자리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와 같은 것들을 묘사하면 그들의 경악하는 반응이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칭할 때가 있는데 묘한 기분을 느낀다. 한편 독일사회의 문제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독일 출신이 아니니 불평은 하지만 어느 정도 남의 일처럼 여기고 지나갈 수 있다. 나는 양쪽 어디에도 정확히 소속되지 않는 이 거리감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에서 나는 나보다 앞서 이런 생각을 한 어떤 지성인의 멋진 구절을 발견했다. 신형철은 ‘언어의 이주민을 위하여’라는 꼭지에서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라는 에세이집을 소개하는데, 성인이 되어서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모국어가 내 온몸에 기입해놓은 온갖 생각의 코드를 비로소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정리하며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다와다 요코는 20대 초반에 홀로 독일로 이주해 독일에서 공부했고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쓴다.)
…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부탁해 국제소포로 받은 이 책을 베를린에서 읽으며, 나는 어떤 중간지대에 서있는 내 마음상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 꼭지의 제목처럼 ‘언어의 이주민’이었다. 나는 모국어가 너무 편한 나머지, 모국어로 속을 들여다보지도, 내보이지도 않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대화를 하는 법까지 익혀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모국어와는 달리 관성처럼 내뱉을 수 없어 자기 검열을 더 필요로 하는 외국어가 내게 필요했나 보다. 이건 특정한 언어의 탓이 아니라 익숙하고 타성에 젖게 하는 것들이 모두 그런 것 같다. 그걸 벗어나자고 나는 이렇게 남의 땅에서 언어적 소수자의 신분으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나를 보호해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제한하던 모국어라는 껍데기를 깨고 나온 바깥세상은 그래서 차갑지만 시원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