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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08. 2024

엄마는 꽃을 남겼다

2021년 여름, 독일에 온 지 1년 9개월 만에 엄마의 부고를 듣고 한국에 들어갔다. 그 귀향길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롭고 힘들었다. 슬픔과 충격에다가, 내 멋대로 독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엄마의 인생 끝자락 1년 9개월 동안 내가 곁에 없었다는 사실에 죄책감도 컸다. 지금은 그로부터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엄마에 관한 글을 쓸 수 있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난 한국에 다녀오면서 느낀 어떤 감정 때문이다. 나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엄마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지에 관해 쓰려한다. 특히 엄마가 없는 집에서 아빠와 나 사이에 싹튼 특별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 집안은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분위기에 더해 어렸을 때부터 형편이 안 좋았다. 그래서 아빠는 절약과 근면성실을 모토 삼아 인생을 전투모드로 살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 내 일생동안 아빠의 직업은 열 개도 넘었던 같은데 그 정도로 아빠는 강한 생활력의 살아있는 예시이자 새마을운동 정신 하나로 살아온 전후 세대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자식에게 당근보다는 채찍을 훨씬 많이 주는 분이다. 반면 엄마는 온화하고 그 옛날시대 사람, 특히 가진 것 별로 없는 시골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 치고는 드물게 예술적 감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소소한 일상의 감상을 담은 글을 잡지에 몇 번 싣기도 했지만 출산과 육아로 삶이 팍팍해지며 엄마의 삶에 예술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졌다. 그럼에도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내 엉뚱한 질문에도 단 한 번도 '그냥 그런 줄 알아' 혹은 '애들은 몰라도 돼'라고 뭉개는 일 없이 어떻게 해서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셨을 정도로 열린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나는 당연히 엄마와의 관계가 더 가까웠다. 아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왠지, 엄마를 기준으로 혹은 엄마를 통해 상대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우리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든 간에 정서적 거리는 엄마와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로 온 이후에도 나는 엄마와 2-3일에 한 번씩 통화를 했지만 아빠에게는 전화를 한 적이 없다. 엄마와 아빠는 한 팀이니까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면 아빠도 퉁쳐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별일 없는 걸 엄마가 알고 아빠가 엄마를 통해 그걸 들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내게 그런 얘기를 하셨다. '니는 어떻게 아빠한테 한 번도 전화를 안 하노.'


나는 돌이켜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 충격이기도 했고 아빠가 나를 생각보다 많이 아끼고 있구나 하고 놀라기도 했다. 나는 아빠 말을 가장 안 듣는, 나이는 제일 많은 게 철은 제일 없는 통제불능의 첫째 딸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동생들에 비해 10대 때부터 아빠와 유난히 부딪히는 집안의 트러블메이커였다. 독립해 살면서부터 마찰은 줄어들었지만 아빠와 나의 세계관은 너무나 달라서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으려고만 하면 금세 분란이 일었다.

 별거 아닌 예로 내가 20대 후반이나 되어 부모님이 슬금슬금 '얘가 시집은 가려나'라는 조바심을 아마도 내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나는 '결혼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아빠가 인간의 도리 등과 같은 반박 논리를 펼쳤다. 그래도 내가 굽히지 않자 아빠는 내게 '니는 왜 괴물이 됐노'라고 하셨다. 여행하고 놀러 다니느라 저축을 별로 못하는 내 습관도 아빠는 늘 못마땅해하셨고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즐기면서 살련다 하는 내 라이프스타일이 도저히 이해 안 되셨을 것이다.


사실은 자식이 대한민국이라는 치열한 사회에서 아쉬운 것 없이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너무 간절했던 거라고, 그때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그 생각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 참 좌절스러웠다. 무튼 우리 관계가 기존에 이래 왔으니 아빠가 나를 보고 싶어 할 거란,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할 거란 생각을 크게 못 했다. 그러나 엄마를 잃은 우리는 모두가 변했다. 우리는 엄마에 대한 슬픔과 미안함, 고마움에 남아있는 서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엄마와의 일화를 떠올리고 이런저런 일들을 추억하며 서로의 상처를 달랬다. 무엇보다도 아빠도 이렇게 감정과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사나흘은 아빠와 삼 남매 모두가 아빠의 포도밭에서 종일 일했다. 평생을 못해봤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포도알이 더 커지기 전에 송이의 모양을 예쁘게 하고 알 굵기를 적당히 맞추기 위해 알을 솎아내는 작업은 그 타이밍이 아주 중요해서 장례를 치르는 사흘 간 손을 놓은 타격이 이미 꽤 컸다. 알 솎아내기 작업이 더 늦춰지면 안 되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지친 마음을 되레 달랬다. 집에서 하릴없이 울고만 있는 것보다는 집중해 끝내야 할 육체노동이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일주일이 흘렀다. 타 지역에 사는 여동생은 일주일의 조사 휴가가 끝나자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고 아빠와 같이 사는 남동생도 마찬가지 시기에 일터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슬픔 뒤로 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코로나 덕분에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베를린의 대학 수업을 일주일 만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히 농번기였고 아빠는 포도밭 일로 바빴다. 집에서 가장 시간이 많은 사람은 나였기에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썼다. 집에서 수업을 들으며 남는 많은 시간에 요리를 하고 빨래를 했는데, 혼자 자취하며 느껴온 살림의 양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부담을 느꼈다. 뭐 해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아빠의 입맛에 맞춰 요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요리를 어떻게든 해내긴 했지만,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게 된 것이 너무 죄송하고 씁쓸했다. 한국에서 대학졸업 후 타지에서 취업하고 자취하면서 나는 살림에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 내가 짧은 시간에 이리도 많은 쓰레기를 배출해 낸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그러니 그땐 한 달에 한번 집에 오는 것이 나에겐 그지없는 휴식이었다. 때 되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것이, 자취생이 되어보니 큰 복이구나 알게 되었다. 좀 나이 들고서는 엄마 밥을 얻어먹은 후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가끔씩 나섰는데 엄마는 세상에, 그걸 못하게 했다.


그랬던 우리 집의 의미가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얌체처럼 와서 쉬다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부쩍 늙은 아빠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내가 그릇 하나라도 더 닦고 반찬 하나라도 더 만들어놔야 마음이 편한 곳이 되었다. 그동안 엄마가 떠맡던 가사노동의 무게, 엄마가 우리에게 묵묵히 보여준 헌신은 엄청난 사랑을 의미했음에도 우리 모두는 그걸 당연히 여겼다. 그런 엄마가 없는 집은 이제 어딘가 울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사실 엄마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낄 사람은 바로 아빠일 이다. 아빠를 향해 애틋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생겼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아빠도 언젠가는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혹은 그 엄연한 사실에 나는 이중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그 해에는 6개월 만에 한국에 다시 와서 아빠와 동생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했다. 내가 꼭 같이 김장을 하자고 했다. 김장은 경조사나 명절에 비하면 정말 작은 이벤트, 혹은 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없는 첫 김장은 우리 가족에게 의미가 컸다. 어떤 일들은 엄마가 없이도 해내야 하고, 어떤 일들은 이제 엄마가 없으니 그만해야 하는 삶의 기로에서 아빠의 결정이 너무 어렵지 않게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고 있다. 올해 한국에 한 달 동안 머물며 느낀 점은 아빠가 제법 홀로서기를 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 귀찮게 할까 봐 어떨 때는 밥은 알아서 먹겠다고도 하시고 최근에는 TV 보다는 책을 많이 읽으며 생활 습관을 바꿔야겠다고도 하셨다. 그나저나 같이 사는 아들도 있고, 이따금씩 사위와 손녀딸을 데리고 놀러 오는 둘째 딸도 있는데 1년에 한 번 오는 나한테 그동안 미뤄둔 자잘한 볼일들을 던져주신다. '니 있는 동안에 이거 좀 해도'라면서. 이번에 해결해 드린 민원은 매트리스 사기, 휴대폰 케이스 바꾸기, 치매 보험 알아보기, 국경 없는 의사회 정기 후원 시작하기,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입해 버린 휴대폰 유료 부가 서비스 해지하기, TV 액정 수리, 태블릿에 전자도서관 설치 등이었다. (지금 생각난 것. 이 깨진 그릇 모아서 버리기도 주문 들어왔었는데 깜빡하고 안 하고 와버렸다!) 이런 일들을 처리하며, 일단 삼 남매 중에 내가 시간이 제일 많으니 그러는 거겠지만, 아빠가 제는 를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도 느꼈다. 아무래도 첫째니까 함께한 세월도 가장 길고 나이차가 그나마 적으니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또 한국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엄마가 없는 세상에 천천히 적응해 간 동생들과 달리 독일에서 일 년마다 한국에 오며 '엄마가 없다니' 느끼는 내가 아빠를 보는 시각도 다를 것이다. 나는 이래저래 부모님께 지은 죄가 훨씬 많으니 말이다.


엄마가 없으니 이제 아빠와 나는 직접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이가 완전히 살가워졌다거나 대화가 끊이지 않는 그런 친한 친구 같은 분위기가 가능해진 건 아니다. 늘 그렇듯 이번에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내가 집에서 머문 시간 대부분 나는 내 방에, 아빠는 아빠 방에 콕 박혀 있었다. (엄마는 내가 집에 와있는 동안에는 종종 내 방에 놀러 오고 그랬는데 아빠는 전혀 아니다.) 우리는 거실 없는 시골집에 살기 때문에 얼굴을 보려면 서로의 방에 찾아가거나 밥을 함께 먹거나 요리나 청소 등 뭔가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각자 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무료한 휴가는 나름 특별했다. 꼭 어떤 활동을 함께 하지는 않더라도 옆방에 있는 서로의 존재를 통화하는 소리, TV 소리, 피아노 치는 소리 같은 것들로 확인하는 이것도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대륙에서 보내는 가족에게는 건강한 휴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빠를 자주 못 보기 때문에 독일로 돌아가는 날엔 아빠에게 포옹하며 꼭 이렇게 인사한다.


"사랑해요!"


이렇게 쓰면서도 참 낯간지럽다. 우리 집안사람들에겐 무뚝뚝함이 핏줄에 흐르는데, 포옹하며 '사랑해요'라니. 사실 이건 엄마한테 배운 거다. 엄마는 소녀 같은 면이 있어 그냥 꼭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가 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한다고 마음속에 간직만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그 누구도 먼저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유럽에서 포옹과 애정표현이 연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간에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겪었기에, 소위 '유럽 물' 몇 년 먹었다고 이제 이런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은커녕 일생동안 한국 땅을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우리 엄마는 이것을, 자신의 부모님도 남편도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왔을까.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여자.


덧붙이자면 아빠가 공익단체에 정기후원하고 싶다 하신 것도 엄마의 영향이다. 엄마는 자신의 수입이 아주 적은 시절에도 어느 사회복지시설에 정기후원 했었고 아빠는 이제 늦으나마 그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마는 아빠만큼 절약정신이 투철하진 못했어도, 자신의 생각을 거창하게 꾸며서 표현할 줄은 몰랐어도, 선한 것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엄마가 내게 심어 놓은 씨앗이 내 삶에 어떤 모양으로 꽃피는 것을 보며 나는 엄마와 아직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엄마는 꽃을 좋아해서 우리 마당에도 꽃이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당에 엄마가 심어놓은 채송화와 봉숭아가 물 마시고 싶다고 안달이었다. 아직 꽃피지 않은 그 식물들을 보며 나는 엄마와의 이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 몰랐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나는 베를린에서 이런 꿈을 꾸었다. 빨강 주황 노랑 빛의 꽃들이 언덕을 꽉 채우고 있었고 언덕 한편에 엄마가 뒷짐을 쥐고 서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뒷모습을 보고 외쳤다. 엄마, 꽃을 이렇게 많이 심어놓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꿈은 나의 슬픔을 나의 깨어있는 이성보다 더 잘 설명해 주었다. 엄마는 떠나서 이 세상에 없고 나는 슬프다. 그러나 엄마는 우리에게 꽃을 남겼다. 바로 사랑하기, 아름다운 것을 귀하게 여기기라는 꽃이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남기거나 세상에 거짓과 오물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엄마가 남긴 것은 이렇게 두고두고 볼수록 해사하고 향기롭다. 그걸 엄마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은 내가 그저 바보처럼 느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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