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마시다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했었다. 그랬기에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세수도 해가며 더 이상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발생했다. 이때 우리 동문들은 어떤 이슈에 대해서 두 편으로 나뉘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내 의견을 물어왔다. 마침 나도 관심이 많았던 이슈였던지라 할 말이 무척 많았었고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정신없이 떠들다가 그 잠깐 사이에 방금 전 화장실에서 다짐했던 약속을 까먹은 것이 틀림없다. '그만 마셔야지'라고 했던 약속을.
당시에 사모님은 모대학의 의상학과 교수님이셨고 여제자들이 많았다. 사모님께서는 졸업한 제자들 중 한 명을 내게 소개해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아주 좋은 제자가 있다고 하시면서.
난 당연히 감사하다고 거듭 말씀드리면서, 속으로는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취한 상태에서도 크게 실수하지 않고, 오히려 비교적 좋은 인상을 사모님께 드렸었나 보다. 교수님께서 내게 심부름을 보낸 것도, 사모님이 그 말씀을 하실 기회를 만들려고 그러셨었던 듯하다.
도대체 내가 사모님께 무슨 말씀을 드렸었기에 나를 잘 보신 것일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이제는 두 분 다 고인이 되셨기에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스테리가 되었다.
아무튼 이 경험 덕분에 난 필름 끊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술자리에서는 술을 너무 사양할 수도 없어 조금씩이라도 계속 마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처럼 술이 약한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필름이 끊기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아무튼 난 그러했는데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술자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것은 직장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직장에서는 그랬단 얘기일 뿐,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다른 현명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과음한 다음 날 몸과 마음의 상태가 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