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종류의 사람이 주점에 들른다. 온갖 종류의 사람이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파산한 사람도, 정신이 파산한 사람도, 애인을 거부한 사람도, 친구를 어루만진 사람도 모두 술을 마시러 온다. 이렇게 주점의 고객들을 나열하다보면 고객의 ‘종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저마다의 방문 사정을 파고들수록, ‘종류’라고 할 만한 공통점 없이 제각각으로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문장을 수정한다. 온갖 사람이, 주점에 들른다.
그들은 주점에 와서 술을 마시지만 실은 미를 마시는 것이다. 사정에서는 분류가 불가능해도 미 앞에서는 모두가 확실히, 같은 인간이 되어버리니 슬슬 분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이런저런 종들을 읊자면 미를 마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미를 눈앞에 둔 자는 그를 더 아름답게 느끼기 위해 마신다. 미를 눈앞에 두지 못한 자는 한때 눈앞에 있었던 미를 더 선명히 기억하기 위해 마신다. 과거에도 미를 누리지 못한 자는 불운을 살아내는 가운데, 아름다움의 껍질만이라도 체험하기 위해 알콜성 환상을 좇는다.
나는 미 아닌 목적으로 주점에 들르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곳의 사람들은 대개 셋 중 하나에 속하리라. 더욱 솔직해지자면 나는, 미 아닌 목적으로 요 생에 들르는 이를 보지 못했다. 선? 그들은 다만 선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진? 그들은 다만 옳은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선한 것은 아름답고, 모든 진실한 것은 아름다운데, 선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아름다움이야말로 요 생의 가장 포괄적인 목적이다.
진선의 여집합에는 주점 안 사람들의 눈빛과 몸짓이 있다. 취해 망가지는 나를, 무너져가는, 무로 눌러 붙는, 흐려지는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그 악의를 숨기지들 않는다. 또한 주점에 오고도 나를 그대로 내버려둠으로써, 나 홀로 이 흐려짐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다들 미의 화신으로서 걷지 않던가? 저 황홀한 다리 여럿을 보라! 가늘기도 굵기도 하면서 멋진 굴곡으로 움직이며 특히 무릎, 무릎에서 곡선미가 절정으로 드러나는바 나는 그 울룩불룩한 중앙이라든지 허벅지나 종아리로 넘어가려는 골짝에서 숨이 넘어가버린다! 그것이 움직일 때에, 대개 떠나갈 때에는, 얼룩덜룩한 그림자마저 서글프게도 좋다! 좋다. 나는 저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육체미만큼은 간파한다. 그와 같은 것이 요 생에서만큼은 미가 근본적임을 알려온다.
그러니 사실, 주점에서는 돈 내지 않고도 미를 볼 수 있다. 미 마시러 오는 이들, 미 좇아 온 몸들 그 자체와 그 지향만으로도 아름다워서 그렇다. 손으로 잔을 당기는 삼 초, 쓴술이 혀를 적시는 일 초, 테이블 아래로 종아리와 종아리가 만나는 순간 등등을 관찰하다 보면, 더욱이 겪다보면 아아 미의 풍성함을 알 수 있기에 나는 주점에 온다. 온다기보다 늘 머무름에 가깝다. 나는 나인 이상 요기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도 안 받고 이렇게 술을 거나히 먹이나 보다. 다른 손님들만이 알록달록한 동전을 들고 왕래한다.
그런데 나와 더불어 술파는 사람도 매일 같이 이곳에 있다. 문을 열기 전부터 의자에 앉아, 내가 졸릴 때쯤 문을 닫고 나가는 그대는 세 부류의 인간 중 어디에 속하는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며 흩어져버리는 예외였음 싶다. 미를 마시는 네 번째 방법을 내게 가르쳐주었으면 해서 말이다. 마심으로써 미를 포기할 수 있는 방식을, 그대가 아는 것처럼 뵌다.
마심으로써 미를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방식 역시 미를 향유하는 가능성 중 하나이다. 포기되기 직전의 미, 즉 절대로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면서 누려지는 미는 얼마나 절박하고 드높을 것인가? 나는 이제 절정 찍고 바닥치려는 것이다. 발로 왕관을 찰 수 있다면 낙사가 괜찮다는 것이다. 더 이상 크고 작은 미에 달려 나가고 가슴 뛰고 손뼉 치는 일에 지쳐버렸으므로, 그럴 수만 있다면 최종 단 한 번, 엄청난 것을 섭취한 뒤 종말 같은 포만을 느끼며 목적을 게워내련다. 미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생이 싫어서, 그런데 요기서는 둘이 동치이므로 실은 미가 미워서가 맞는 이유로, 라고 최후의 방식을 요구하니 그대가 답했다.
나는 미를 키우는 것만이 사명이니 미를 지양하는 것은 주점 밖에서나 가능하십니다. 주점에 머무르면서 미를 포기하려 들지 마시요. 네가 만든 나의 주점에서 그런 소리 하시려면 나가시요.
그대가 옳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주점인간이어서 도무지 ‘내’가, ‘주점 밖’에, 있을 수 없었다. 절정 찍는 것, 목적의 간판을 내리는 것, 마지막으로서 사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왕래하는 미를 지긋이 지켜보나 보다. 구토를 해도 미에 대한 지향을 뱉진 않는다.
Cover image: Sandro Botticelli, Primavera, 1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