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괭이>를 읽고
남 모르는 내 작은 반지하방에
괭이 한 마리 살고 있었네
나도 외롭고
괭이도 외로워
우리는 서로 정 깊은 동무였네
외출에서 돌아오면
괭이는 내 품에 안겨들어
야웅, 소리를 내고
제 볼을 내 가슴에 부비고
장난 그리운 아이의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네
나밖에 모르고
하루 종일 나 없는 빈방을 지키며
나만 기다린 내 괭이
나도 녀석의 목덜미를 만져주고 등허리를 쓸어주고
여린 발톱마저 애무해 주다 보면
시간은 나와 내 괭이 옆에서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을까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은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는
내 괭이를 위해 노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와
내 괭이와 함께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를 밤새 듣던 나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 방민호, 「괭이」(2010)
「괭이」를 읽으며 나의 알로에를 떠올렸다. 지난 해 일 년 동안 살았던 모스크바의 60년 넘은 낡고 퀴퀴한 기숙사 방은 꼭 관짝처럼 좁고 기다란 모양이었다. 시의 화자가 남모르는 작은 반지하방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애틋한 시간을 보냈듯, 난 그 방 창틀에 작은 알로에 화분을 하나 들여 놓곤 참 많은 정을 쏟아 부었다. 기숙사 방을 들고 날 때면 처음과 마지막 눈길은 항상 그 말 한 마디 없는 알로에에 가닿게 되었다. 마음을 붙였던 사람이 떠날 땐 괜히 하염없이 알로에만 바라보고, 마른 잎을 정리하곤 했다. 알로에를 돌보다보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괭이」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도 외롭고 괭이도 외로워’ 둘은 서로 정 깊은 동무였다 얘기하지만 실상 그가 말하는 괭이의 외로움이란 그 당시 그의 해석에 불과하다. 자신이 외로웠기에 괭이도 외로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녀석의 목덜미를 만져주고 등허리를 쓸어주고 애무해주는 건 비단 자신의 외로움의 분출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부를 어루만진다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대상에 나를 단순히 투영하는 것을 넘어서서 시간과 애정을 쏟아 그것을 나의 일부로 만들고, 스스로를 일종의 객체화함으로써 아픔을 조금 더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이 아닌 ‘괭이’라는 말로 자신이 키웠던 고양이를 추억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읽었던 책의 한 대목을 떠올리니 이해가 된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정원에 가득 핀 장미꽃을 보고는 슬퍼하는 어린왕자에게 ‘너의 장미꽃이 소중한 건 네가 네 장미에 들인 시간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따로 붙인 이름이 아닌 ‘내 괭이’라는 보통 명사로의 호칭, 그냥 ‘고양이’도 아닌 ‘괭이’라는 호칭이 시인의 고양이를 오히려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이때 ‘나의’ 괭이라는 것은 소유의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그에게 들인 시간과 애정을 드러내는 단어이며, 수많은 고양이들 중 그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를 ‘우리 동네’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애인’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도 모스크바에서의 알로에와 지금 키우고 있는 거북이에게 이름을 붙여두고선 그냥 내 알로에라고, 내 거북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시에서는 외로움과 동시에 그리움의 감정이 두드러진다. ‘시간은 나와 내 괭이 옆에서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줄 알았다’는 화자의 말에선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내 괭이를 어루만지던 사랑스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다는 소망과 함께,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지난한 시간도 결국엔 끝이 났다는 의미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회상적인 어조에서 잔잔히 번지던 과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은/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는/ 내 괭이를 위해 노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와/ 내 괭이와 함께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를 밤새 듣던 나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라는 마지막 다섯 행에서 전면에 드러난다. 과거 화자의 처지가 썩 평탄하지 않았음에도 화자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는 시에서 드러나지 않은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지만,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과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라는 시어에서 짐작컨대 그 시절 자신을 가만하고 오롯하게 받아들여줬던 그 ‘유일했던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어린왕자』의 대화를 다시 인용해 본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나는 외로워’라는 어린왕자의 말에 뱀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라고 답한다. 작년 알로에를 키우던 때엔 혼자 있으니 외로운 게 당연하단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람들 사이 누군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 홀로 있을 때 경험하는 당연한 외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반지하방에 살던 시절 화자는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고양이 한 마리에 자신의 온 존재를 투영하며 삶을 지탱했고, 간신히 그 시기를 지나왔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 공간과 그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 것 아닐까. 괭이와 함께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를 듣던 밤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던, 영원이길 바랐던 시간인 것이다.
*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