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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란 Sep 22. 2019


도착하지 않은 사람과 남은 이야기

아직 읽지 못한 스물다섯 권의 동화책


 
 
 
 
 햇살 좋은 한낮, 어머니가 마당에서 배추를 다듬어 고무 함지에 절이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든 남자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토방에 앉아 낯선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배추를 절이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더니 주저 없이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남자의 가방에서 몇 권의 책과 전단지가 나왔다. 어머니는 굵은 소금이 묻은 손으로 남자가 내민 전단지와 책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부엌으로 가더니 꼬깃꼬깃한 지폐를 들고 나왔다. 
 저녁 무렵에 남자가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왔다. 상자를 열어 보니 책이 빽빽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 스물다섯 권을 월부로 샀다. 원래는 한 질이 오십 권인데 어머니는 반절만 샀던 것이다. 스물다섯 권을 전부 읽으면 나머지를 사 주마. 어머니가 언니에게 말했다. 초등학생인 언니를 위해 산 동화책이었다.
 내가 언니의 책꽂이에 꽂힌 동화책 스물다섯 권 중에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앨코트의 <작은 아씨들>이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동화책이지만 글씨도 작고 그림이라곤 드문드문 흑백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었지만 나는 글자들 속에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막내인 에이미에게 유난히 애착이 갔다. 그건 내가 네 자매 중 막내였기 때문이었다.
 작은 아씨들 중 둘째인 조처럼 나의 둘째 언니도 책 읽기를 좋아하고 밤이면 혼자 공책에 무언가를 끼적거리곤 했다. 중학생인 작은 언니의 책꽂이에는 세로로 글자들이 빽빽한 삼중당 문고들이 꽂혀 있었다.
 어머니가 사준 동화책 스물다섯 권을 모두 읽었지만 나머지 스물다섯 권은 집으로 배달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의 책 읽기는 계몽사 명작동화에서 갑자기 삼중당과 을유문화사,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으로 멀리 뛰기를 했다. 더 이상 동화책을 사주지 않는 몸이 아픈 어머니 때문에 나는 작은 언니의 책꽂이에서 몰래 책을 뽑아 들고 방 한쪽 구석에 숨어서 책을 읽었다. 깨알 같이 작은 글씨가 세로로 찍혀 있어서 같은 문장을 두 번씩 읽을 때도 있었다. 김동리와 김유정, 김동인, 세르반데스, 헤밍웨이, 브론테 자매, 헤르만 헷세를 읽었다. 몰래 책을 읽다가 작은 언니에게 들켜 야단을 맞기도 했다.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책을 읽으면 겉늙어 버린다고 언니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작은 언니가 새 책을 사 오면 언니가 읽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가져다 읽기를 계속했다. 책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아무튼 책은 마술처럼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새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들뜨고 설렜다. 잦은 이사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나는 자라면서 나만의 책장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읽은 책들은 거의 친구에게서 빌리거나 학교 도서실에서 대출 받은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무렵 자취를 했는데 우연히 학교 후배의 집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자신의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걸 알고 때때로 맛난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한번은 주인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평소에는 구경도 못하는 비싼 고기반찬이 상에 올랐지만 나는 밥보다는 주인집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책장에 마음이 팔려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저녁밥을 먹자고 청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외아들, 초등학교에 다니는 후배 남동생의 공부를 봐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숙제를 도와주고 예습 복습을 시켜 주면 매달 내는 방세를 면제해 주고 얼마간의 용돈도 주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승낙을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말했다. 거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빌려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어차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날부터 나는 주인집 거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한 권씩 가져다 읽었다. 동화출판공사에서 나온 세계문학대전집은 모두 백 권이었다. 전에 읽었던 책들과 비교도 안 되게 크고 두꺼운 책이라서 나는 항상 두 손으로 책을 펼쳐들고 앉아서 읽었다. 발자크와 노신, 말로, 생떽쥐베리, 졸라, 푸르우스트, 단테, 도스또옙스키, 톨스토이를 읽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나는 후배 집에서 나와 강북으로 이사를 했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상전집이며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 소유의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절대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아이로 유명해졌다. 내가 산 책은 거의 청계천 헌 책방에서 헐값으로 사 모은 거라 낡고 오래 된 것뿐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거나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페이지가 함부로 뜯겨져 나간 것도 있었다. 후배의 집에서 읽었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안나까레리나>를 헌 책방에서 발견하고 주저 없이 그것을 샀다. 일곱 살 무렵 어머니가 외판원 남자에게 샀던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를 본 것도 청계천 헌 책방에서였다. 일 권부터 오십 권까지 차례로 묶여 있지 않고 순서가 뒤죽박죽인 채 열 권씩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표지 색이 바래고 손때가 잔뜩 낀 진홍빛 동화책을 발견한 순간 나는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어머니가 사준 스물다섯 권의 동화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한두 권씩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그 책 중 일부는 청계천 헌 책방으로 흘러나와 누군가의 손에 팔려갔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동화책을 사지 않고 헌 책방을 나왔다. 내게 책 읽는 즐거움을 가르쳐 준 것은 스물다섯 권의 동화책이었고, 책 읽기의 갈망을 일깨워 준 것은 읽지 못한 스물다섯 권의 동화책이었다. 나는 읽지 못한 나머지 동화책을 그대로 비워 놓고 싶었다.
 
 책을 사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덜어진 지금도 나는 가끔 청계천을 뒤져 누군가의 손때 묻은 오래 된 책을 산다. 이따금 이미 읽은 책을 살 때도 있다. 빌린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군데군데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다시 읽고 싶은 곳이 있으면 페이지를 접어놓는다.
 헌 책이나 새로 나온 책을 사려고 서점에 가면 나는 무의식 중에 먼저 페이지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책이 얇으면 조금 망설이게 된다. 소설이든 철학서든 종교서적이든 상관 없이 나는 우선 분량이 많은 책에 이끌린다. 분량이 많은 것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오랜 시간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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