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나는 저물녘이 되면 천변 길을 걷는다. 날씨가 궂지 않으면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로 북적이는 부용천 산책로를 한 시간 남짓 혼자 걷다가 작업실로 돌아온다. 개를 데리고 나오거나 둘씩 짝을 짓거나 온 가족이 함께 나온 사람들 속에서 나는 걷는다.
한여름 도심의 산책로는 더위를 피해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로 소란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쉬면서 부채질을 하거나 한담을 나누는 노인들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빠르게 걷는 청년, 목줄을 쥔 주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멈춰 서서 냄새를 맡고 해찰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느리게 걷는다.
나는 천변을 따라 띄엄띄엄 심긴 나무를 보면서 걷는다. 지난여름 태풍에 쓰러진 버들나무는 해가 지나도록 바로 서지 못하고 휘어진 가지가 물에 잠겨 있다. 맑지도 탁하지도 않은 물에는 오리가 산다. 오리는 떼를 짓거나 하나나 둘씩 떨어져서 부지런히 헤엄을 친다. 왜가리 한 마리가 물가에 내려앉았다가 날아간다. 산책을 하는 노인이 과자를 물에 던져준다.
눈발이 날리는 겨울에 나는 부용천 산책로를 처음 걸었다. 온종일 작업실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리가 너무 아파서 운동 삼아 걸어볼 요량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나는 두툼한 점퍼를 입고 모자를 눌러 쓰고 빠르게 걸었다. 날씨가 춥고 귀찮아서 꾀가 나기도 했지만 한 시간 남짓 걷고 돌아오면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해찰을 하며 걷다가 물에 있는 오리를 보았다. 군데군데 얼음이 언 차가운 물에 오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물속에 발을 담근 채 가만히 떠 있거나 자맥질을 하거나 헤엄쳐가는 오리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가락이 곱아들 것처럼 추운 날씨였다. 나는 날이 어두워지면 오리들이 어디로 가서 밤을 보낼지 궁금했다. 비가 쏟아지고 눈이 펑펑 날리면 피할 수 있을 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스러웠다. 오리 한 마리가 물속에 잠겨 있는 돌덩이 위로 올라갔다. 크고 작은 돌덩이가 군데군데 있지만 오리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산책을 할 때마다 오리들이 무사한지 살폈다. 폭설과 추위를 견디면서 여전히 건강하게 헤엄치는 오리들이 대견하고 반가웠지만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오리들은 묵묵히 물속에 잠겨 놀고 헤어치고 자맥질을 했다.
오리에게 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돌아가서 쉴 집이 없는 오리들이 딱했다. 길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사람에게만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올여름은 전남 담양 시골마을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 시골이나 도시나 뜨겁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늘을 넓게 드리운 나무가 많아서 더위를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제라도 그늘을 내주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서 있고 농가 마당의 배롱나무는 붉은 꽃을 활짝 피웠다. 집 담장과 길가에는 봉숭아와 채송화, 금잔화, 맥문동 꽃이 피고 텃밭에는 토마토가 익어갔다.
해거름에 방을 나와 마을길을 산책할 때면 농가 마당에 묶여 있는 개들이 컹컹 짖었다. 크고 힘 있고 무서워 보이는 개는 시골 마을의 파수꾼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사방이 깜깜해지면 개는 작은 집으로 들어가서 쉴 수 있었다.
담양에 머물러 있는 동안 종종 소쇄원(瀟灑園)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과 왕버들나무와 왕벚꽃나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걷고 싶은 길이었다. 몇 시간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을 길을 지나자 소쇄원 입구가 나왔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안내 팸플릿을 받았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양산보(1503~1557)가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별서정원이라고 팸플릿에 소개되어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로 능주에 유배되고 죽임을 당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고향인 창암촌에 소쇄원을 조성하였다. 양산보가 낙향한 1519년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소쇄원은 송순, 김인후 등의 도움을 받고 그의 아들과 손자 등 3대에 걸쳐 완성되어 현재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초정과 대봉대를 지나 애양단, 매대, 광풍각, 제월당까지 걸어 올라갔다. 제월당 기둥에 기대서서 목 백일홍 꽃을 바라보고 천천히 되짚어 길을 내려오다가 도랑에서 헤엄치는 오리들을 보았다.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긴 정원의 이름처럼 투명한 물이 흐르는 도랑에서 오리들이 물을 튀기면서 놀고 있었다.
땀이 흐르는 한여름에 물속의 오리들은 더운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늘을 드리운 크고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은 사람뿐 아니라 오리들이 놀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도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리들을 빤히 쳐다보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오가면서 흘긋거렸다.
도랑 위쪽으로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오리들의 집이었다. 비가 쏟아지거나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면 오리들이 돌아가서 쉴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집이 있어서 좋으냐고 물어도 오리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짝을 지어 헤엄쳐갔다.
소쇄원의 오리들에게는 집이 있었다. 해가 저물면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