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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l 10. 2023

'되려는' 사람 말고, '하는' 사람.

될 수는 없어도 할 수는 있으니까.


주말아침, 후다닥 볶음밥 한 냄비를 해서 사 남매 아침을 해결하고 아이들을 도서관에 보낸 뒤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책 정리를 해야지, 겨울 카펫을 걷어야지, 현관 청소를 해야지 하면서 하루 이틀 미뤄둔 게 언제인지 집 안 꼴이 말이 아니게 돼버렸다. 분명 난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인데, 보이는 모든 곳에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더는 봐줄 수가 없어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을 때가 오전 11시, 청소를 끝내고 개운하게 씻고 나오니 하루가 지난 오전 12시 30분이 되었다. 정말, 온종일 청소만 했다.


덕분에 거실 바닥에 윤기가 흐르고, 집 안 곳곳에 빈 공간이 생겼다. 에어컨 뒤, 침대와 서랍장 아래 묵은 먼지 지를 긁어낼 땐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제 구실을 못하고 물건을 쌓아두거나 잡동사니를 넣어두는(실은 숨겨두는) 용도로 전락한 화장대와 작은 콘솔은 당근마켓에 올려 이웃에 나눔 했고, 녹슨 자전거 3대는 치우려고 잠시 밖에 세워뒀는데 누군가 들고 가서 폐기물 스티커값이 굳어 잘됐다 했다. 내일은 아이들 책을 정리하니 쓸모가 없어진 책장과, 이불을 뒤집어 씌어 방공호처럼 사용하던 기다란 책상을 이웃에게 나눔 할 예정이다. 그럼 또 빈 공간이 생길 거다. 물건이 없는 휑덩그렁함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오는 평온함이 있다. 남들 눈에는 조금 삭막해 보일 수 있어도, 나는 그런 공간의 홀가분함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당근에서 중고로 구매 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첫째가 한참 책을 탐독할 때 사주었던 어마무시한 두께의 책들. 깨알 같은 글자가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안 샀을 텐데, 괜한 욕심에 덜컥 사들여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아이들이 하도 들여다봐서 중간중간 찢기고 낡은 위즈키즈나 과학소년은 당근에 올리자마자 더러워도 괜찮다며  환영받았는데, 저건 빳빳한 종이에 오만지식이 다 들어있어도 찬밥이다. 그냥 준데도 아무도 안 가져간다. 그걸 내가 4년 전에 20만 원이나 주고 낑낑대며 사들였다. 오늘저녁엔 꼭 재활용코너에 내놓아야지...(흑흑).



겨울 카펫을 걷어내고, 안 보는 책을 솎아내고, 묵은 짐을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곧 시작될 방학 전 단축수업과, 길고 긴 한 달여간의 방학을 앞두고 큰 일을 해치운 것만 같다. 물론, 가족 중 누구도 그런 기분을 느끼진 않을 거다. 청소나 정리정돈은 언제나 내 몫이라, 공들여 치운 보람도 혼자만의 몫이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난, 혼자만의 뿌듯함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중이니까.



오늘 밤엔 말끔해진 집과 산뜻한 교감을 나누며 새 단편소설을 시작할 거다. 그리고 날 응원해 준 친구의 말에 기대 이번에 마무리 지은 소설을 조금 더 다듬어 공모전에 도전해 볼 작정이다. 일단은 썼으니까, 시간을 쪼개 완성한 것에 의의를 두고 하는 도전이다. 그렇게라도 한 발 나아가고 싶다. 그저 무어라도 쓰면 된다는 마음과, 정신없는 일상을 핑계로 너무 오래 제자리에 머무른 느낌이다. 이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다. 어쩌면 그래서 또 한 번 청소를 했는지 모른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불안한 마음과, 글쓰기를 생각하면 납작해지는 자아에 억지로라도 용기를 불어넣고 싶어서. 맥없이 허전거리는 걸음에 힘을 좀 실어주고 싶어서 말이다.


청소는 내게 그런거다. 하루라도 잘 살고 싶은 마음, 괜찮은 나를 꺼내보고 싶을때 하는 준비운동 같은 것.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서, 시종일관 '하는 사람'으로 사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처럼 자존감이 바닥에 붙어 있는 사람은 더 그렇다. 수 천 번 할 수 있다고 말해야 잠깐이나마 나를 믿고 제 기능을 한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마음, 하려는 마음만큼은 지켜내고 싶다. 틈틈이 나를 끌어당기는 우울과 불안에 맞서서 끝까지 '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무엇이 될 수는 없어도 할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 결과 따윈 제껴두고라도, 하는 것에 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준비운동을 끝내주게 했으니,

얼마 간 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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