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쉽다 그랬어
최근에 일본어 능력시험인 JLPT N2에 합격했다.
문득 내가 일본어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시험을 치렀고, 제대로 공부를 안 하는 내가 어떻게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일본에 자주 갔었지만 일본어 공부를 처음 접했을 때는 고등학생 때였다. 원피스 애니메이션과 엄마가 일본어로 대화하는 걸 들어왔어서 일본어로 떠듬떠듬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과 시험에서는 한자를 몰라서 항상 7등급 받는 일본어 문맹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한자 과목이 있었지만 2학년 때부터 한자 과목이 없어져서 정말 기초적인 한자만 알았다. 한자를 모르던 나는 일본어 시험이 너무나도 어려웠고, 심지어 한자는 일본어가 아닌 또 다른 언어 같았다. 그렇게 당연히 내 인생에 일본어 공부는 시작과 동시에 포기했다.
그런데 2년 전, 호적메이트가 '곤니치와'밖에 모르면서 일본 워홀을 반년 다녀오더니 JLPT N3를 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어 어학원에 몇 백 썼어도 일본어 실력이 시답지 않아 보였고, 돈 써가며 공부한 호적메이트보단 내가 더 잘할 것 같아서 나도 같은 시험에 응시했다. 몇 년 만에 다시 공부해보겠다고 N3 책을 잔뜩 사뒀지만 한자가 너무 보기 싫어서 첫 장만 읽어보고 덮었다. 당시 베트남에 있었을 때라 비행기 타고 시험 보러 갔지만 공부를 한 시간도 안 했던 터라 마음을 비우고 시험을 봤다.
같이 시험을 치르고 나온 뒤, 호적메이트는 시험이 쉬웠다고 했는데 불합격이었고, 반면에 난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합격했다. 당연히 커트라인과 가까운 점수였지만, 이때부터 일본어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고 워홀 버프로 자신만만해하던 호적메이트의 기를 눌러버렸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남매는 다 이런 거죠?) 원래 노력 대비 성과가 좋을 때 만족도가 최상이지 않은가. 일본어 7등급이라는 성적이 깨끗이 씻겨 나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최근에 베트남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와 다른 진로를 선택하기 전에 N2 시험에 도전했다. 전생에 신데렐라의 새언니였던 엄마 아들이 공부도 안 할 거면서 N3 책을 돈 아깝게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구박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N2 책은 청해 책만 한 권 구매했다. 반년 동안 어학원에서 훈계질 스텟만 올렸나 보다. 두 달 동안 문제를 풀기보다는 청해 책 mp3 파일을 계속 들으며 따라 했다. 들리는 만큼 읽히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한자와 문법 자료를 찾아서 봤다. 외운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읽기만 했다.
시험에서는 최대한 집중했지만 시간 내에 다 풀지는 못했다. N2 시험 시간이 170분이라 읽히지도 않는 한자를 집중해서 읽어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공부량도 적었고 청해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마음 놓고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 JLPT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두 달이 걸려서 정말 목 빠진다. 내가 시험운이 있는 건지 겨우 과락을 면하고 청해 빨로 간당간당하게 총점 커트라인을 넘어서 또 합격했다! 이번에도 최소한의 비용과 공부량으로 합격한 터라 점수는 낮아도 만족도는 만점이다.
솔직히 이 정도 실력으로 N2를 가지고 있어도 될까 싶어서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토익 900점대 점수를 가지고 있더라도 영어를 잘한다고 말 못하듯 설령 내가 N1 합격 점수를 가지고 있어도 분명 일본어를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N1 수준은 원어민의 35% 정도의 언어 수준이라고 한다. 엄마는 일본어로 일본인과 대화하는데 방언과 사투리를 알아들을 정도로 능숙하지만 시험에는 젬병일 것이다. 반대로 나는 자격증이 있어도 일본어로 대화하면 버벅거리기 일수다. 이번 시험 결과는 단지 자기만족 또는 기관제출용이 될 뿐, 내 일본어 능력이 형편없는 건 나만 알래.
도쿄에 있는 최애 테판야키 가게 예약 전화할 때 말고는 실질적으로 일본어 쓸 일이 없었는데 언젠가 도움이 되는 때가 있길 기대하며 N1 공부를 시작해 보려 한다. 끝으로 도쿄에 있는 '하쿠슈 테판야키' 소개합니다.(광고X) 이가 없어도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고베 소고기! 항상 사람이 많아 예약은 필수! 육즙이 식빵에도 적셔져 후식으로 식빵 드시면 존맛입니다. 도쿄 갈 때마다 방문하는 가게인데 식도락 하러 또 일본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