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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정희매 Apr 03. 2022

신용산 요가원

1화  12시40분

“신 대리, 빨리 상무님 일정에 확인하고 이번 주 목요일 스케줄 잡아놔!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김 부장의 성격 급함을 잘 아는 윤정은 상무 비서와 김 부장 중 누가 더 무서운가를 가늠하며 

상무 비서에게로 향했다.


사무실 끝에서 끝 쪽으로 걸어가며 벽시계를 한번 힐끔 쳐다봤다.   

12시 40분 

점심시간이 마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20분을 기다려야 하나’ 사무실 중간쯤에 서서 갈등하는 윤정은 잠시 주춤하다가 김 부장의 ‘지금 당장’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다시 비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같은 층인데도 한쪽은 불이 훤하게 켜져 있고 한쪽은 전등을 모두 꺼 놔서 컴컴하다. 

이 불을 꺼놓은 사람은 보나 마나 상무 비서다.   

카펫이 깔린 바닥이라 구두 굽 소리는 거의 안 나지만 점심시간 조용한 적막을 비집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비서 소현이 재킷을 뒤집어쓴 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옆에는 검정 샤넬 백이 얌전히 놓아져 있다. 

“저기 소현 씨!”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불러봤다. 

아무 움직임도 없다. 

윤정이 더 큰 소리로 내 볼까 했지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애꿎은 목만 탓하며 헛기침을 몇 번했다. 아무 기척도 없다. 


비서 뒷자리에 서서 책상을 뻘쭘하니 책상을 둘러본다. 

책상 오른쪽에는 상무님 일정표가 클리어 파일에 들어가 있고, 

형형 색색의 볼펜들도 가지런히 연필꽂이에 정리되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도 연필꽂이 옆에 가지런히 쌓여 있다. 

서류로 잔뜩 어질러진 윤정의 책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책상은 훨씬 깨끗해 보일까’ 

급한 업무를 마치고 시간이 되면 오늘 중으로 윤정도 책상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뒤쪽에 놓인 파티션에는 친구들과 핼러윈 파티를 하며 찍은 사진이며, 

생일 파티 때 남자 친구와 찍은 사진들이 나란히 붙어 있다. 

사진 속 소현 씨는 모두 화려하고 예쁘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어서 정말 밝고 마치 천사 같다. 

한참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불러 본다.    

“소현 씨, 자는데 깨워서 미안한데요” 

어깨를 살짝 톡톡 칠까 하다가 의자 등받이를 살짝 두들겼다. 

“아~이 씨” 

작은 짜증 소리를 내며 재킷 아래로 소현이 얼굴을 내밀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깊게 잤는지 손거울을 보면서 침을 흘린 것을 닦았다.


‘요렇게 인형같이 생긴 사람들도 나처럼 침 흘리고 자네’

라는 생각에 크크 웃음이 나오려다가 소현의 미간에 주름이 팍 들어간 것을 보며 

윤정은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연거푸 미안하다고 전했다. 

“점심시간에 이런 부탁해서 너무 미안한데, 상무님 목요일 오후 2시 일정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비어 있으면 저희 팀장님 보고 일정 좀 잡아주세요.”


클리어 파일에서 일정표를 꺼내서 쓱 살펴본 소현은 “알겠어요.”라고 하며 컴퓨터 스크린을 켰다. 

어두운 사무실에 파란 스크린이 켜지자 윤정과 소현 모두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정표에 ‘기획팀장 보고’라고 입력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윤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현 씨, 너무 고마워요! 내가 담에 커피 살게요.”

소현이 다시 재킷을 뒤집어쓰고 엎드리는 것을 보면서 발길을 돌렸다.


비서에게 임원 일정 하나 넣는 거 부탁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쓰겠나 싶으면서도 

요즘 어린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일하는 거 싫어하니까 짜증 내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순간 ‘점심시간에 계속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어린 사람이 아닌가’라고 윤정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89년생 33살. 

가까스로 90년 대생에 끼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밀레니얼 세대이자 

MZ 세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인데 본인은 왜 점심시간을 다 바쳐가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문뜩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윤정이 제일 좋아하는 요가 선생님이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수업을 예약하려면 나름 일주일 전에 시간을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온라인 신청을 해놔야 했다. 

5분 만에 학생 20명이 예약이 다 차고 그 뒤로도 순식간에 5명이 대기를 설만큼 인기 있는 수업이다. 


오늘 오전 11시 40분. 

보통 같으면 팀장과 팀원들이 점심 먹으러 슬슬 일어나는 시간인데, 

김 부장이 보고서 마무리하고 밥 먹자는 말에 윤정은 아쉬운 마음으로 요가원에 취소 카톡을 보냈다. 

[죄송합니다만 12시 수업 취소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 수업에 봬요]

카톡 메시지는 깔끔하고 간단했지만 윤정의 마음은 착잡했다. 

오늘 점심때 요가를 해야 주말 동안 굳은 몸도 풀고 상쾌하게 오후 일정을 마무리 짓을 수 있는데, 

모두 날아가 버린 느낌이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누군가가 신나서 요가원으로 달려가겠지’ 

누군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괜스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1시 20분이 되어서야 부장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코로나 덕분에 편리해진 점은 “오늘 점심은 따로 먹겠습니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거나 예의 없어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 부장도 “어~ 그래 맛있게 먹어”라고 쿨한 멘트를 날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와 셀러디로 향했다. 

점심시간에는 줄이 꽤 긴 편인데 1시 30분이 넘은 지금은 한산해서 좋다.

샐러드와 랩 중에 무엇을 먹을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랩으로 골랐다. 

“멕시칸 랩 하나 주세요. 소스는 반만 넣어주시면 되고 먹고 갈게요.”  


회사 식권 앱으로 6000원을 쓰고 나머지 500원은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예전 같으면 500원을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1000원 미만의 계산에도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 민망해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잠시 그게 언제부터였을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시점은 모르겠다. 


아르바이트생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건가? 

아르바이트생이야 카드든 현금이든 받으면 그만이니깐. 

그렇지만 윤정이 아는 몇몇 가게에서는 사장님들도 1000원 미만의 카드 결제를 흔쾌히 받아 주신다. 

직장인이 많은 상권이고 워낙 바쁜 시간이다 보니 

“현금 없어요?”라고 묻고 따지고 할 겨를이 없어서 그런가. 

예전에 읽은 경제신문에서 1000원 미만의 수수료는 50원 내외라고 봤던 것도 같다.

어쩜 1000원 미만의 수수료율이 크게 낮아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현금 없이 카드 한 장만 달랑 핸드폰에 끼워 넣고 다니는 윤정의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감사하다.


쟁반에 멕시칸 랩을 받아서 랩 반쪽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면서 음식도 꼭꼭 씹어먹고 싶지만 

오후에 할 일을 생각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특히 오늘 칼퇴를 하려면 더욱 마음이 조급하다.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 모임이 저녁 7시 양재동에서 있다. 

언뜻 ‘네이버 길 찾기’로 본 기억에 의하면 양재역 앞에 있는 식당이 아니라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이라 6시에 땡 하고 나아가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 랩 반쪽을 쳐다보면 잠시 고민을 하던 윤정은 직원에게 작은 봉지를 하나 얻어서 

그 안에 반쪽 랩을 넣고 둘둘 말았다. 

아직 허기는 다 안 찼다.

하지만 오늘 친구들과 저녁도 실컷 먹을 것이니 시간도 아낄 겸 이건 낼 아침식사로 남겨두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비닐봉지에 ‘신윤정’이라고 네임펜으로 이름을 적고 냉장고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내일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윤정은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설정했다. 


08시00분

[냉장고 랩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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