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페레로로쉐
윤정은 6시 10분이 되어서야 컴퓨터를 끄며 서둘러 옷걸이에서 옷을 꺼냈다.
핸드폰, 가방을 양손으로 후다닥 집으며 책상을 다시 둘러봤다.
아직 자리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김 부장보다도 어질러진 책상이 더 마음에 걸렸다.
다시 가방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1분이라도 치우고 가자’
책상에 어질러진 서류는 서류들끼리, 책들을 책끼리 착착 소리를 내며 나름 가지런히 놓았다.
연필꽂이가 없이 그냥 책상에 굴러다니던 펜들은 한 손으로 툭 툭 툭 집어서 서랍 안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큰 변화가 안 보이겠지만 윤정 스스로에게는 작은 변화가 보였다.
책상에 놓인 물건의 숫자는 비슷하지만, 어질러진 것과 나란히 놓인 것은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이라고 속을 생각하며 김 부장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그래 낼 봐!” 일에 집중한 김 부장의 답변은 건성이지만 오히려 윤정은 그런 답변이 좋다.
세상은 어느덧 윗사람의 퇴근시간을 눈치 보며 팀원들이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있다.
작은 변하지만 이만큼 변한 게 어딘가 싶다.
다다닥 에스컬레이터를 미끄러지듯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지하철 역을 향했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몇몇이 손에 초콜릿이 들려있는 게 힐끔 보였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보니 좁아터진 지하철에서도 꽃이나 초콜릿을 든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살짝 빈틈이 생긴 틈을 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봤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네.
3년이 넘도록 연애를 안 하고 있는 윤정에게 밸런타인데이는 어느새 잊혀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까맣게 있고 있는 자신도 웃기지만 이런 날 동창 모임을 잡은 친구들도 참 불쌍하다 생각됐다.
‘다들 데이트 안 하나.’
그리고 보니 아까 소현 씨 책상에 있던 초콜릿도 생각났다.
양재역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15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지금 시간에 택시를 타자니 돈도 아깝고 걷는 시간이랑 비슷할 것 같았다.
단톡방에 ‘지금 양재에서 내렸어. 15분 정도 늦을 거 같아. 미안해’ 란 메시지를 보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지나가는 편의점마다 앞다투어 초콜릿을 가판대에 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인지 ‘SALE’ 표시를 붙여놓은 가게들도 많았다.
윤정은 ‘어차피 조금 늦은 거 초콜릿이라도 사가자’란 생각에 페레로로쉐 하트박스를 샀다.
7500원 하는 초콜릿 박스 위로 초콜릿 3개짜리 봉지가 덤으로 붙어있었다.
이제는 전 국민이 먹는 흔한 초콜릿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윤정에게는 작은 추억이 담긴 초콜릿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남학생에게 받은 게 바로 이 페레로로쉐 하트박스였다.
그때는 밸런타인은 아니고 크리스마스이브여서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이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이 초콜릿이 너무 맛있었다.
하나하나 금박으로 포장된 것도 어쩜 그렇게 고급스럽고 예뻤던지. 무엇보다 윤정의 마음에 든 것은 순서대로 다양한 맛과 촉감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입에 넣었을 때는 초콜릿 겉면에 있는 오돌토돌한 헤이즐넛 조각들을 혀를 즐겁게 했다.
처음에 땅콩 조각인 줄 알고 먹었는데 성분을 이리저리 읽다 보니 땅콩은 없었다.
헤이즐넛 조각이란다.
초콜릿이 녹으면서 헤이즐넛 조각들이 더 도드라지게 느껴질 즈음, 이로 살짝 깨물면 바삭한 과자가 나온다. 그리고 연이어 가장 맛있는 부드러운 초콜릿 크림이 입안 가득 쏟아진다.
정말 이렇게 기가 막힌 조화를 누가 만들었을까 감탄하며 선물 준 친구의 센스에 감동도 받았다.
8개 초콜릿을 한 달 동안 아껴 먹었다.
자신을 좋게 봐준 친구의 마음과 맛있는 선물이 고맙다는 답장도 작은 카드에 적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을 카드를 들고 친구 집 앞을 서성이다가 끝끝내 전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 친구와는 다른 학교로 갈라져 머쓱한 사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 초콜릿을 볼 때면 겨우내 먹던 그 추억이 그리고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15분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식당 앞에 도착하니 아직 쌀쌀한 겨울 날씨인데도 등에서 살짝 땀이 났다.
인적이 드문 길가에 나무로 지어진 단독 건물이 노란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양재에 이런 곳이 있었네’ 일본 긴자 어딘가에 있을법한 고급 이자카야처럼 보였다.
반들반들해진 나무계단을 밝고 2층으로 올라가자 칸막이 사이로 친구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윤정이 꼴찌였다.
동창들끼리 앉는데 단체 소개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 셋, 여자 둘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음식을 시켜서 윤정의 도착과 함께 음식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야! 딱 맞춰서 잘 왔다.”, “윤정이는 먹을 복 있네”, “어! 윤정 너 머리 언제 잘랐어? 잘 어울린다.”
4년 만에 만난 친구들인데도 일주일 전에 만난 친구들처럼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직접 만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서로들 카톡이나 SNS를 통해서 서로의 근황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공백이 그렇게 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해! 초콜릿부터 받아! 오다 보니 오늘이 밸런타인이더라고.”
윤정은 가방에서 초콜릿 통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11개니깐 2개씩 주자. 하나는 내가 먹어야지’ 두 개씩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졌다.
대각선 멀리 있는 현겸에게는 팔이 닫지 않았다.
“현겸아! 받아!”
윤정은 초콜릿 두 개를 테이블 위로 쭈욱 던지듯 밀었다.
초콜릿 두 개는 한 쌍의 덩어리가 되어 접시들 사이를 지나 미끄러지듯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정말 기가 막히게 현겸 앞에서 딱 정지했다.
완벽한 슬라이딩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지어 현겸을 쳐다보고 있던 윤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친구들의 대화 속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현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정아! 초콜릿 다시 줘! 이렇게 던지듯 초콜릿 주는 거 아니야. 그래도 선물인데 손으로 전달해줘야지.”
현겸이 일어나서 초콜릿 두 개를 다시 윤정에게 줬다.
윤정도 얼떨결에 ‘으응 미안해.”라고 하며 일어나 허리를 수그린 채 두 손으로 초콜릿을 받았다.
조명이 현겸을 비추고 있어서 그런가 현겸의 얼굴이 유독 밝고 빛이 나 보였다.
“자! 초콜릿 다시 줄게! 이번엔 이렇게 손으로 준다. 근데 현겸아! 너 지금도 키가 크니? 오늘따라 더 커 보인다.”
윤정은 새삼 달라 보이는 현겸을 다시 쳐다보며 키 얘기를 꺼냈다.
“그럴 리가. 유럽 물 좀 먹었다고 키가 컸을까?” 현겸은 피식 웃으면서 “그렇지! 선물은 이렇게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거야!”라며 말했다.
마치 어른에게 예의 없다고 혼났다가 다시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을 받은 거 같아서 윤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편의점에서 후딱 사온 초콜릿인데 이렇게 정중하게 의미를 부여해 받는 현겸의 모습이 특이하기도 하고 유독 혼자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먹었는지 어디에 넣었는지 관심도 없어하는 초콜릿이었다.
“윤정아 그거 알아? 이 초콜릿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다. 난생처음” 친구들 대화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도 현겸의 말이 하나하나 윤정의 귀에 똑바로 꼽쳤다.
“아! 그래?” 윤정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또 한 번 잘못한 것인 양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첫 번째 이유는 윤정 스스로에게 ‘내가 그렇게 인정이 없는 친구였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오래된 친구인데 내가 선물 한번 준 적이 없다니’
두 번째 이유는 현겸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말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런 기억이나 사사로운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현겸은 윤정이 모르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응. 내가 밸런타인에 초콜릿 줬었는데도 넌 화이트데이 때 아무것도 안 보내더라고”
“우리 같은 반일 때?” 윤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응, 중 2 때. 기억 안 나?”
“전혀 안 나”
윤정의 머릿속에는 중 3 때 받은 페레로로쉐가 남학생에게 받은 첫 선물이었는데,
그전에 받은 선물이 있었다니.
윤정은 머릿속에 잠시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