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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홍 May 30. 2023

물이 마르면 오늘



 냄새가 났다

문은 열려 있었고

버스는 지나갔다


우리 집은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우뚝 설수록 옥상은 멀어져

인간은 오를수록 죽고 싶을까

아니면 살고 싶을까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놓고 온 우산처럼

필요한지 몰랐어

알면서도 잊어버렸어

신경 쓸 수 없었어


괜찮아


선인장 가시를 만져봤어?

나도 아플 줄 몰랐어

작고 부드럽고 얇은 가시들이

부드러울 줄 알았어

꼭 그렇게 생겼다니까

우두둑 촘촘하게 살갗에 박힐 때

치밀한 유리조각들

박히긴 쉽더니 빼는 건 일이야

하나씩 하나씩 미간을 찡그렸어


오늘은 애호박을 처리했다

상할까 봐 시들까 봐

내가 먹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섞일 거야

내가 듣지 않으면 말은 곪아가겠지

내가 쓰지 않으면 너는 잊어버리겠지


달걀 껍데기는 일반 쓰레기

애호박은 음식물 쓰레기


투명하고 매끄러운 스노우볼

이 안에 고래가 들어있어

내 방엔 스노우볼이 세 개나 있지

그럼 고래는 몇 마리가 있지?


나무와 사람을 그렸을 뿐인데

하얀 고래 조각을 굳혔을 뿐인데

물성을 가진다


내 방엔

나무가 있고 사람이 있고 고래가 있다

너한텐 여름이 있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야


여기에 나를 그리면

그건 내가 되고

너를 그리면

그럼 그건 너인가


집중할 땐 그 노래 좀 꺼 줘

몇 명의 사랑이 스쳐간 노래

울렁거리는 트랙


빗속을 기어가는 인간

철벅철벅 튀는 물

술 냄새가 났다


고개를 내리면 정류장이 보인다

사람들은 있는데

나는 없다


자꾸 까먹지

우산 좀 그만 잃어버려


밤은 없던 불빛을 창조한다

네가 어떤 빛은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멀면 멀수록 별이라 불리던데

아프면 아플수록 가까운 손길이고


향은 진할수록 머리가 아파

도저히 숨길 수 없대


우리 집은 커다란 천이 보이는 아파트

사실 건물에 가려져서 얼마 보이진 않아

그래도 흐르는 물을 느낄 수 있어

마른 가지에 잎이 피면 봄이라던데

물이 익으면 여름

여름이 사라지면 가을

물이 멈추면 겨울


마른 가지는 다시 마른 가지가 되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우뚝 서 있지만

거기 잎이 피었다는 걸

우리는 알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은 없대

사라진 여름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찾지 않지만


그날 비를 제일 처음 맞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그 사람도 모르겠지

그래도 우산은 챙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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