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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홍 May 30. 2023

오랜 기억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도망칠 줄만 알아서, 곁을 맴돌 줄만 알아서, 말을 삼키고 사랑을 숨길 줄만 알아서. 종종 꺼내든 용기마저 모른 체하며 흘려냈다. 엇나가는 마음과 뒤틀린 상황에 익숙해졌다. 잃고 싶지 않았다. 소중할수록 그랬다. 소중할수록 나는 모자란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내게 요즘 연애는 하고 있냐고 물었다.

"아니. 근데 좋아해서 공들이고 있는 사람은 있어. 근데 뭔가  같아. 그래서 답답해. 근데 귀여워. 그래도 답답해. 근데 귀여워. 진짜  이때까지  때문에 진짜 빡쳤겠다. 갈수록  이해하고 있어."

"내가 백 배는 더 빡쳤을걸."


그는 안다. 자신이 내 뮤즈 중 한 명이란 걸 안다. 그가 자신을 써달라고 하기 전부터 그를 글 속에 심어왔단 것도, 내가 아직도 그를 모두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도 분명 알 거다. 늘 나보다 나를 더 알고 있었으니까. 나보다 더 생각 많고 나보다 더 앞서는 애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숱한 마음을 분리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도 잘 알 테다. 나는 계속 털어내는 중이다. 축적된 세월 속에 비밀처럼 섞여 있던 사랑과 상처를 말이다. 그러나 묽은 기억들은 되려 선명해진다. 뒤늦게서야 또 알게 만든다. 같은 감정을 겪고 지난 사랑을 이해하고 늦은 이해에 슬퍼하고.


“너는 왜 나 만날 때만 이렇게 늦는 거지. 주인공병이라도 걸렸나?”


난 자주 늦는 사람이었다.

어디든 늦고 뭐든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추억이 분실되는 건 내게 진하게 각인된 그의 사랑을 완전히 지워내는 것과 같다. 아직은 그렇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그도 이곳에 존재한다. 그와의 추억과 그와 나눈 짙은 취향과 오래도록 나를 구조하던 손길의 사랑을. 며칠 전, 그도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했다. 나는 또 너를 쓸 텐데. 무심과 사랑이 애매하게 교차하는 사람이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제대로 읽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읽더라도 모른 척 넘겨줄 거란 건 안다. 늘 그래왔고 나조차도 그래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 모른 척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 곁을 내내 지켜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예전처럼 지겹도록 잔소리해 달라는 말도, 잊을만하면 뭐든 건네던 선물도, 그 사람답지 않게 걱정해 주던 따뜻한 말들도, 시도 때도 없이 뭐 하냐고 묻던 물음도, 간간이 비추던 그의 용기도 사랑도 정도 미움도 모두 그해 언덕 너머에 멈춰있다.


그저 기억한다. 잊지 않고 감사한다. 나는 몰랐으니까. 아니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을지, 네가 나에게 왜 의지한다고 했던 건지, 왜 그렇게까지 나를 못살게 군다고 착각했는지, 내가 왜 이제야 응어리진 마음을 녹일 수 있었는지, 끝이라곤 없는 우리가 언제까지 이어져 있을지.


나는 여전히 쉽게 버리고 지워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랜 기억을 양분처럼 품고 산다. 줄곧 되풀이될 것이다. 이처럼 인생이 자주 무섭고 든든한 건 다 돌아온다는 거다. 돌고 돌아 비슷한 형태로 눈앞에 놓인다. 신기할 만큼 그렇다. 앞으로 얼마나 더 모르던 것들을 이해하게 될지, 지나친 말들을 주워 담게 될지, 모른 체하던 것들을 직면하게 될지, 얼마나 더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지고 그리워하게 될지. 그가 남겨둔 우물에 비친 나를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희미해질 때쯤, 그것은 현재의 나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여러 겹의 사랑을 몸에 걸친 채 더 곧은 사랑을 건넬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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