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가 났다
문은 열려 있었고
버스는 지나갔다
우리 집은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우뚝 설수록 옥상은 멀어져
인간은 오를수록 죽고 싶을까
아니면 살고 싶을까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놓고 온 우산처럼
필요한지 몰랐어
알면서도 잊어버렸어
신경 쓸 수 없었어
괜찮아
선인장 가시를 만져봤어?
나도 아플 줄 몰랐어
작고 부드럽고 얇은 가시들이
부드러울 줄 알았어
꼭 그렇게 생겼다니까
우두둑 촘촘하게 살갗에 박힐 때
치밀한 유리조각들
박히긴 쉽더니 빼는 건 일이야
하나씩 하나씩 미간을 찡그렸어
오늘은 애호박을 처리했다
상할까 봐 시들까 봐
내가 먹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섞일 거야
내가 듣지 않으면 말은 곪아가겠지
내가 쓰지 않으면 너는 잊어버리겠지
달걀 껍데기는 일반 쓰레기
애호박은 음식물 쓰레기
투명하고 매끄러운 스노우볼
이 안에 고래가 들어있어
내 방엔 스노우볼이 세 개나 있지
그럼 고래는 몇 마리가 있지?
나무와 사람을 그렸을 뿐인데
하얀 고래 조각을 굳혔을 뿐인데
물성을 가진다
내 방엔
나무가 있고 사람이 있고 고래가 있다
너한텐 여름이 있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야
여기에 나를 그리면
그건 내가 되고
너를 그리면
그럼 그건 너인가
집중할 땐 그 노래 좀 꺼 줘
몇 명의 사랑이 스쳐간 노래
울렁거리는 트랙
빗속을 기어가는 인간
철벅철벅 튀는 물
술 냄새가 났다
고개를 내리면 정류장이 보인다
사람들은 있는데
나는 없다
자꾸 까먹지
우산 좀 그만 잃어버려
밤은 없던 불빛을 창조한다
네가 어떤 빛은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멀면 멀수록 별이라 불리던데
아프면 아플수록 가까운 손길이고
향은 진할수록 머리가 아파
도저히 숨길 수 없대
우리 집은 커다란 천이 보이는 아파트
사실 건물에 가려져서 얼마 보이진 않아
그래도 흐르는 물을 느낄 수 있어
마른 가지에 잎이 피면 봄이라던데
물이 익으면 여름
여름이 사라지면 가을
물이 멈추면 겨울
마른 가지는 다시 마른 가지가 되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우뚝 서 있지만
거기 잎이 피었다는 걸
우리는 알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은 없대
사라진 여름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찾지 않지만
그날 비를 제일 처음 맞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그 사람도 모르겠지
그래도 우산은 챙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