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 흔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혜정 Jan 24. 2024

스무 살의 우리에게

네게 머문 마음

  카톡이 계속해서 울린다. 다른 때 같았으면 늦은 시각의 카톡이 거슬렸을 텐데 오히려 설레임을 고조시킨다.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머릿 속 룩북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러다 거울 속 내 모습과 마주하고 내가 제일 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과 함께 고스란히 내려앉은 기미와 염색으로 가리려고 했으나 채 가려지지 않은 흰머리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계속 울려대는 카톡 대화창을 보고 있자니 섣부른 걱정 따위는 사라졌다. 대화에 묻어나는 익숙함 속에 걱정은 고스란히 묻혔다.     


  40대 후반으로 접어든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스무 살 때였다. 교복을 벗고 처음 만난 우리는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우리 과는 정원이 10명밖에 되지 않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과였다는 뜻도 되겠다. 10명이던 우리는 복학한 언니와 전과한 친구 한 명까지 더해서 총 12명이 되었다. 대다수의 친구들이 유순하고 배려심이 많아 우리의 대학생활은 평화롭고 친밀했다고 기억된다.     


  각자의 길을 찾느라 정신없던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한 친구의 결혼식이었던 같다. 많은 친구들이 모였던 것 같고 그때도 이미 몇몇 친구들과는 연결의 끈이 느슨해져 있었다. 그날 이후 모두 함께 모이지는 못했고 1:1로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각자의 길을 찾은 친구들은 다음 수순이라는 듯 결혼을 했고 연이어 출산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보통의 워킹맘들이 그렇듯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오로지 서로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었다.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로 정신없이 바빴고 곁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과거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데 급급했다. 혼자의 삶에서 둘의 삶이 되고, 아이까지 태어나면서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는 그 세계에 익숙해졌고 그곳에서는 늘 24시간이 부족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만 가면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손이 더 많이 갔다. 그 시절에는 자기 자신보다 누구의 엄마나 직장의 직함으로 더 많이 불리곤 했다. 서로에게 또렷했던 우리는 그 시간을 겪으며 서로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레 옅어져갔고 누군가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큰 아이들이 중학생으로 접어드는 시기가 되자 친구들이 하나 둘 ‘엄마’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h가 연락이 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느 날, 불현듯 잘 지내냐는 카톡이 왔다. 단톡방에는 가끔씩이라도 연락을 주고 받던 나와 수원에 사는 e, j와 s가 초대되어 있었다. h는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왔고 s와 연락이 닿아 만나고 있다고 했다.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둘의 사진이 반가움을 싣고 전송되어 왔다.      


  h는 곧 다시 연락하겠다며 꼭 다 같이 만나자고 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좋다고 했고, s는 한 술 더 떠서 호텔이라도 잡아 1박까지 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 단톡방은 내내 조용했다. h는 그간 부산에 내려올 일이 없었던 것인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톡방에 초대받은 다른 친구들도 굳이 안 모이냐고 재촉하지는 않았다. 단톡방이 개설되기 전처럼 우리는 그저 서로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고 매일은 여전히 바쁘고 치열했다.     

 

  h에게 연락이 온 것은 마지막 단톡방의 대화로부터 꼭 1년이 지난 날이었다. 갑자기 h가 부산에 내려오게 되었다며 주말에 만나자고 했다.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만나자고 했고 수원에 있는 e만이 급히 내려오기는 힘들다고 했다. 만남의 장소는 우리가 다니던 대학교 앞으로 정하고 늦은 시간까지 카톡으로 설레임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 앞은 많은 것이 변하기도 했고 동시에 그대로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그날 만난 우리의 모습과도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한 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간의 흔적을 조금씩 안고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들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우리의 스무 살이 새겨진 캠퍼스를 산책하기로 했다. 맨 꼭대기에 있던 우리 과 건물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어 참석하지 못한 e에게 전송했다. 그것은 마치 40대가 된 우리가 20대의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그때의 너희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잘 지내고 있다고, 묻지 않은 안부를 전하는 남겨진 마음 같았다.      


  지금의 우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 따위는 생각지 않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는 지금의 우리를 간절히 원하던 순간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곳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했지만 덜 익었던 이십 대, 누군가의 엄마나 직장 일로 서로가 흐려졌던 삼십 대, 비로소 다시 만난 사십 대, 그리고 서로에게 더 또렷해질 것 같은 오십 대. 그리고 그 너머의 시간까지. 켜켜히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과거를 품고 현재가 되어 버린 어둑해진 캠퍼스를 걸으며 문득, 친구들이 그 자리에 있어 주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속에 깃든 상처로 인해 자신을 내어 보이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건강이든, 일이든, 가정사든. 그런데 우리가 마주 앉아 이십 대의 어느 날 처럼 서스럼없이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지나간 시간 속에 서로를 남겨 둘 사이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갈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마음 든든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도 함께 흐르고 있다. 과거의 시간이 그랬듯 시간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시간의 파도가 험난하지 않기를, 그저 시간의 파도 위에 윤슬만이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란다.      


  합격의 기쁨을 안고 캠퍼스에 처음 발을 딛던 스무 살의 우리가 까만 밤을 밝히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이름은, 장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