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머문 마음
굉장한 소음을 내며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기다렸다는 듯 손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있는 힘껏 내달리던 비행기가 마침내 땅에서 바퀴를 떼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해진 수순처럼 손은 이내 땀으로 흥건해진다. 발이 닿지 않아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인 듯 두려운 순간이다. 벨이 울리고 비행기는 곧 안정권으로 접어든다. 다시 발이 땅에 닿아 안도하던 어린 나처럼 눈 아래 구름을 보자 그제야 땀이 마른다. 몸을 가득 채우던 긴장감이 서서히 설레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올해는 아버지와 나의 생일이 같은 날이다. 아버지와 나는 음력으로 같은 달에 생일이 있고 내 생일이 아버지보다 17일 빠르다. 평생 음력생일을 지내던 나는 올해부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양력 생일을 지내기로 했고 아버지는 그대로 음력생일을 고수하다보니 이런 일도 생겼다. 우리는 겸사겸사 모두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3년간 제대로 된 국내 여행도 못 다니시던 부모님은 미리 생일선물을 받은 듯 기뻐하셨다.
제주도는 사계절이 모두 좋다더니 겨울의 제주도 보는 곳마다 눈길을 머물게 한다. 오랜만에 제주도에 온 딸들도 연신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제는 나보다 더 커버린 큰딸은 자기 아빠와 함께 셀카를 찍고 연신 마주 보고 웃느라 정신이 없다. 팔짱도 끼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여행의 묘미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나는 한 번씩 뒤돌아보며 아버지가 잘 오고 계시는지 살피거나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어줄 뿐이었다.
아버지는 80년대를 대표하는 모범 가장이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다 그랬듯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셨고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운전해서 다니셨고, 지친 몸으로 다시 그 거리를 운전해야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 휴가 며칠을 제외하고는 결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세상에는 회사와 집밖에 없는 듯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셨다. 아버지의 성실은 우리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나의 미래가 되어 주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다. 성격이 급하고, 승부욕이 강하며, 가끔 욱하는 것도 아버지와 닮았다. 외모며 성격, 좋아하는 음식까지 엄마보다는 아버지를 압도적으로 많이 닮았다. 하지만 자라면서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엄마를 닮고 싶었고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누구보다 예쁘고 싶은 청소년기였다.
바쁜 아버지 대신 엄마가 늘 곁에 계셨기에 아버지보다는 엄마와 마음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우리를 데리고 먼 거리도 마다않고 여행을 다니셨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해 주려 애쓰시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엄마보다 항상 어려운 존재였다. 엄마와 나눈 이야기가 전집을 이룬다면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는 어쩌면 메모지 한 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가기 시작한건 아버지가 은퇴를 하시고 우리 딸들이 태어나면서부터다. 그 시기에 우리 사이를 흐르는 말들의 많은 부분은 의견대립이었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잔소리였다. 어쩌면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상당 부분 언쟁이나 회피로 채워졌고 때로 내 마음에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또한 사랑이라 이해해 보려 했지만 쉬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두려웠던 나는 엄마와 새로운 전집을 쓸 만큼 대화를 했고 오랜 세월 아버지의 곁을 지킨 엄마는 늘 나의 든든한 둑이 되어 주었다.
그런 아버지도 손녀들에 대해서는 유난한 애정을 보여주곤 하셨다. tv에 딸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해도 전화하시고, 자는 아이를 보고 가셨을 때는 일어나서 울지 않았는지 꼭 전화하셨다. 딸들에 관한 한 사소한 일까지도 궁금해하셨다. 이제는 중학생과 초등 고학년이 된 딸들에게도 관심은 여전하다. 어쩌면 관심과 애정의 깊이는 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핸드폰 속에 나는 ‘딸’이라고 저장되어 있지만 우리 딸은 ‘예쁜 손녀’로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애정표현인 것 같다.
가족여행이라 기분이 좋으셨는지 제주도에서 아버지는 농담도 잘하시고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 여전히 손녀들을 살뜰히 챙기시고 엄마에게 늘 그래왔듯 이것저것 요구하기도 하셨다. 제주도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우리는 식당에서 생일파티를 했다. 케잌 대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파운드 케잌을 드렸고 용돈도 드렸다. 아버지는 답례로 식사비를 기분좋게 지불하셨다. 그리고 칭찬에 인색한 우리 아버지가 남편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본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자 감사였을 것이라고 헤아려 본다.
내가 태어나던 45년 전 그날,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14년 전, 내가 첫 딸과 처음 만나던 그때처럼 다소 어색하고 실감 나지 않았을까? 겉으로 잘 표현하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기뻤을까? 그때의 마음이야 어쨌건 내가 아버지 인생에 선물 같은 존재였다면 좋겠다. 집과 회사가 전부이던 그의 세상에서 나로 인해 아버지의 세상이 좀 더 기쁘고 희망찼었기를 바란다. 또한 비록 내게 들리게 잘했다, 고맙다, 사랑한다 말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었던 삶의 순간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미처 내게 도착하지 못한 그 말들이 가득했었기를 바란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남편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버지의 팔짱을 다정히 끼고 거리를 거닐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풀어낸다. 둘 사이를 흐르는 언어의 강에 가장 유유히 흐르는 낱말이 ‘사랑한다’이며 작디 작은 성공에도 ‘잘했다’는 말을 흘려보내는 사이. 비록 나의 아버지가 내게 그런 존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으며 존재만으로 감사함에는 틀림없다. 당신도 아버지가 처음이었고, 당신 또한 아버지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40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80 평생을 이해해 보려고 마음을 내어 본다.
오늘도 아버지는 내게 전화한다. 아이들은 잘 있는지,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아버지 나름의 애정표현이리라. 전화를 끊고 생각한다. 더 다정할 수 없었는지. 내 인생의 탄탄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던 젊은 날의 아버지처럼 나 또한 아버지의 다정한 울타리가 되어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강에는 무슨 말들을 흘려보내야 할까? 수많은 말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침잠하기를 반복한다. 한 단어를 고르기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다. 이제 와 평생 흘려보내지 않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에는 어색하다. 강물을 헤집다 잠시 정적과 마주해 본다. 단어 대신 한 가지 바람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버지와 나 사이에 흐르는 강이 오래오래 이어지는 것이다. 마르지 않는 강이 변치 않고 서로에게 닿기를 바란다.
다음 번 아버지의 전화는 더 다정하게 받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