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연수
INTO THE UNKNOWN
연수 15일째. 2주간 머물렀던 히로시마시립대학교 기숙사를 떠나 둘 혹은 혼자 홈스테이 생활을 하는 날이었다. 또 다른 시작을 잘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아침이었다. 언니 J와 함께 덜컹거리는 캐리어를 이끌고 1층 로비로 내려가자, 한가득 모여서 웅성거리던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꽂혔다. 이 중 누가 우리를 데리고 갈까. 간단한 인사를 하고 모퉁이 한 켠에 캐리어를 세웠다. 들쳐멘 가방, 갈 곳을 잃은 시선, 자꾸 꼼지락거리게 되는 발가락. 새벽 인력시장에서 누군가가 태워가길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일꾼들처럼 서 있었다.
사실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부터 홈스테이에 대한 긴장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히로시마 생활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니 막막했기 때문이다. 원어민처럼 ‘솰라솰라’ 말하진 못 하기에, 내 말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어 홈스테이 가족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작년에 먼저 연수를 다녀온 언니 P는 집이 엄청 추워서 얼어죽는 줄 알았다고 했는데 내가 가는 곳도 그럴까? 홈스테이 가족들이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로 밤을 채우고 말았다. 차라리 누가 어느 집에 배정받았는지 미리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나보다 일본에서의 경험이 더 많은 언니 J와 함께 생활하게 되어서 조금은 안심이었다. 일본어가 막혀도 서로 도우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나 혼자 한 집에 배정받았다면 얼마나 헤맬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다른 연수생들이 모두 로비에 모이자, 우리는 교수님께 호명되어 차례차례 각자의 가족들을 찾아갔다. 이제 갈라지면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떨어진다니 다들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J와 나란히 서서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잠시 뒤 내가 만나게 된 사람은 이무라 씨라고 불린 푸근한 인상의 어머님이었다. 어젯밤 혼자 걱정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선한 인상을 가진 분이셨다. 이무라 씨와 함께 우릴 마중 나왔다가 찬 바람에 볼이 빨개진 여자아이는 이름이 아미라고 했다. 내 동생과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 그런지 괜히 이것저것 말을 걸어서 빨리 친해지고 싶었다. 남편분은 집에 계시고, 첫째 마이와 둘째 나오키는 각각 일이 있어서 못 왔다고 했다. 조금 어색하면서도 안심되었던 첫 만남 후, 본격적으로 홈스테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이무라 씨의 차에 캐리어를 실었다.
타코야키는 밥이 될 수 있을까
운전석에는 이무라 씨, 조수석에는 아미, 그리고 뒷좌석에는 나와 J가 함께 탔다. 연수 시작 전에 미리 학과 측으로 제출했던 간단한 자기소개서가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에 도움이 됐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고, 이때다 싶어서 아미에게 말을 붙여보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응’, ‘그렇구나’와 같은 짤막하고도 명료한 대답뿐이었다. 아미가 원래 낯을 좀 가린다는 이무라 씨의 말씀에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싶어서 괜히 머쓱해졌다. 어색한 침묵은 이무라 씨의 질문으로 깨졌다. 혹시 타코야키 좋아하냐고 물어보시길래 정말 좋아한다고 답하자, 안그래도 오늘 점심에는 타코야키를 먹으려고 했는데 잘 됐다고 웃으셨다. 새콤한 소스맛을 떠올리니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응?
타코야키가 밥이 될 수 있나?
평소에 타코야키는 붕어빵이나 호떡 같은 간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심이 타코야키라는 말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왠지 오늘은 제대로 된 점심을 먹지 못할 각오를 해둬야 할 것 같았다. 크고 작은 도로들을 지날수록 자동차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차고가 있는 목조 주택이었다. 차 트렁크에서 내 캐리어를 꺼내고 나니 괜히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실수라도 하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남의 집에 처음 들어갈 때 하는 인사가 뭐였더라.
失礼します(시츠레시마스) : 실례합니다.
손잡이가 차가운 철문을 열자 현관에 가지런하게 놓인 신발과 실내용 슬리퍼가 보였다. 양말만 신은 발로 바닥을 딛자마자 왜 슬리퍼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현관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거실 겸 부엌이, 오른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욕실이, 앞쪽에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뭔가 휑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더니 높은 천장에 달린 전등이 나무로 된 내벽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마이의 방과 나오키의 방이 있었고, 계단과 가장 가까운 방이 우리가 머무를 방이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다다미가 깔린 바닥에 가구와 이불이 놓여있었다. (건물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글을 통해서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밥보다는 먼, 붕어빵보다는 가까운.
간단하게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왔더니, 거실 식탁 위에 동그란 구멍이 파인 불판이 놓여있었다. 이무라 씨는 타코야키에 들어갈 문어를 꺼내고 계셨고, 아미는 식탁 근처에서 다른 재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어,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 파슬리, 타코야키 소스, 마요네즈, 치즈, 기름, 그리고 기다란 꼬챙이까지. 재료를 보자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가다랑어포 봉지만 만지작거리는 나와 J를 지켜보던 아미는 먼저 나서서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아미 선생님(?)의 지도로, 나는 문어를 가위로 잘게 자르고, J는 밀가루 반죽에 야채를 썰어 넣었다. 아까까지 조수석에서 조용히 트와이스 노래를 틀고 이무라 씨하고만 얘기하던 모습보다는 밝아진 것 같아서 기뻤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아미는 조용히 재료로 팔을 뻗었다. 아미는 팬에 기름을 붓고 뚱뚱한 붓으로 구멍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칠한 뒤, 반죽을 팬에 가득 부었다. 팬은 반죽으로 가득 차서 마치 원래 구멍이 없었던 것처럼 보여서 이렇게 많이 부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에 이런 걱정도 묻혀버렸다. 아미는 문어 조각 몇 개를 한쪽 손에 들고, 다른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하나씩 구멍에 맞춰 넣었다. 멍하게 보다가 나도 문어를 한 움큼 들고 아미를 도왔다. 반죽 테두리가 진해지면서 맛있는 냄새가 올라올 때쯤, 삐져나온 반죽을 꼬챙이로 구멍 안에 밀어 넣으면서 동그란 모양을 잡아주었다. 잠시 뒤 손에 든 꼬챙이로 타코야키 하나를 푸욱 찔러보더니,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아미가 왠지 듬직해보였다.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도 쑥쓰러워하는 기색없이 타코야키를 덜어가는 아미는 일류였다.
우린 각자 먹을 만큼 앞접시에 타코야키를 덜어서 취향대로 마무리를 했다. (나는 마요네즈와 타코야키 소스, 가다랑어포, 파슬리를 얹었다) 따끈한 타코야키 위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가다랑어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었고, 작은 동그라미 다섯 개가 모여있는 모습은 귀엽고 앙증맞았다. 학교 앞 트럭에서 남이 구워주는 건 먹어봤어도 이렇게 직접 구워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괜히 신이 났다. 아미도 우리랑 잘 지내려고 노력해준 게 고마워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입안을 데지 않도록 후후 불어서 한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학교 앞 트럭에서 팔던 건 식어서 미적지근한데다가 문어는 콩알만큼 들어가고 소스 맛밖에 안 났는데, 이건 그보다 훨씬 풍성한 맛이었다. 접시에 덜었던 건 순식간에 사라졌고, 우린 아미와 함께 또 타코야키를 구웠다. 타코야키를 굴릴 때마다 꼬챙이 끝으로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감이 정말 귀여웠다. 요리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소꿉놀이를 하면서 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5판 정도를 더 만들자 모두 젓가락을 손에서 놓았다. 정말 태어나서 타코야키를 이렇게 많이 먹어본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안 찰 것 같았는데, 어느새 따뜻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타코야키 불판은 일본에서는 보통 집집마다 한 대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기계다. 그래서 이런 타코야키 파티, 즉 ‘타코파’ 또한 일본의 일상들 중 하나라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사람과 낯선 장소에서 느꼈던 긴장감도, 타코야키로는 배가 차기 힘들 것이라는 편견도, 타코야키를 굴리면서 모두 잊어버렸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아미를 비롯한 우리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나도 타코야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다. 밥보다는 멀지만, 붕어빵 보다는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