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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예 Mar 21. 2021

지금 이곳이 아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

비 내리는 히로시마

여기에도 비는 내리더라

 연수 18일 차. 비가 온다는 소식에 모두가 투명한 편의점 우산을 들고 히로시마역 남쪽 입구로 모였다. 누가 봐도 낯선 이방인들이었다. 우산이 조금 거추장스러웠지만 다른 나라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여태껏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비가 오는 날을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머물지 않은 여행이었기에 늘 한국에서 내리는 비만 맞아봤기 때문이다. 괜히 우산을 들고 다니면서 낯선 길을 걸으니 왠지 이 나라 어딘가에 몇 년씩 살아온 내 집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야호가 그때 유행했더라면

 벌써 2주가 넘도록 전투적으로 히로시마를 둘러봤는데 여전히 못 가본 곳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새로 방문하는 곳이 나에게 서로 다른 자극을 주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무래도 히로시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3주도 부족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히로시마성. 지하도를 빠져나와 조금 걸었더니 탁 트인 곳이 나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자와 정갈하게 정리된 초록이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해자를 지나 조금 걸었더니 바로 코앞에 성이 나타났다. 3층 정도 높이였는데 층마다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있었다. 꼭대기 층에서는 건물빛을 닮은 하늘이 보였다. 무야호가 좀 더 빨리 유행했더라면 한 번 외치고 왔을 텐데. 난간 쪽에는 영화 ‘월E’에 나오는 로봇처럼 생긴 전망대 망원경이 있었다. 혹시 공짜인가 싶어서 아무거나 붙잡고 눈부터 들이밀어 봤지만 역시 자본주의 사회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글자 ‘50엔’이 눈썹을 씰룩거리게 했다. 그러나 원래 한국에선 안 하던 일도 여행지에서는 다 해보고 싶어지는 법. 손은 눈보다 빨랐다. 구멍 뚫린 동전 하나가 손끝을 떠나 경쾌하게 기계로 빨려 들어갔다. 눈앞이 밝아지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물이었다. 참방거리는 소리까지 가까워진 느낌이 든 건 기분 탓이었겠지. 그러나 아무리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려봐도 보이는 거라고는 오리떼가 헤엄치면서 만드는 파장뿐이었다. 결국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다시 캄캄해졌다. 이날 내가 망원경으로 보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히로시마 성을 나왔을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갔다. 한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성 안을 휘젓고 다녔더니 배가 헛헛해졌고,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본어에 지친 세 사람 앞에는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 오리떼가 보였다.




나: 아 오리고기 땡긴다

R: 언니 배고픈데 진짜 이러기가

J: 헐 나 한국 가서 오리고기 먹고 싶어

나: 나는 거기에 머스타드 소스...

R: 와미쳤다 나는 깻잎...

J: 우리 이제 오리 그만보자 괴롭다






납자악하고 동그란 '규탕'

 오후 일정까지 마무리하고 배고픔과 피곤함이 몰려오자, 돌아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J와 함께 카베역에 도착했더니 익숙한 자동차 한 대가 보였다. 조수석 창문 너머로 아미와 이무라 씨가 손을 흔들었다. 호다닥 뒷좌석에 올라타자 오늘 저녁은 야끼니쿠라는 말을 들었다. 우린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지만 뜨끈한 불판과 노릇노릇한 고기를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잠시 뒤 자동차가 가득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전에 왔던 비 때문에 바닥이 찰박거리는데도 고기를 먹으러 온 사람이 수두룩했다. 가게 안은 전체적으로 바처럼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였다. 서비스업 미소를 한 종업원이 인원을 묻고 우리를 안내하더니 테이블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아적을 준비를 했다. 나는 종업원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메뉴판을 봐도 뭐가 무슨 고기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무라 씨는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키라고 하시는데, 가격을 보니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남의 나라에서 남이 사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배터지게 먹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언니도 그냥 아주머니가 시켜주시는 대로 먹으려고 하는데, 언니가 메뉴판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면서 아주머니께 규탕이 어쩌구 하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자 이무라 씨가 소 혀 한번 먹어보라고 말씀해주셨다. 엥 진짜 그걸 먹는다고? 언니는 이건 먹어봐야 안다면서 일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마음이 동해서 나도 소 혀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문을 받아적은 종업원은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고기를 들고 나타났다. 우린 각자의 앞에 놓인 얇은 집게로 자기가 먹고 싶은 고기를 먹었다. 누구 하나 희생할 필요 없이 알아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잠시 뒤 종업원이 붉은 고기가 담긴 접시 하나를 우리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른 고기와 다르게 동그랗게 썰린 모양은 바로 혀를 떠올리게 했다. 괜히 내 혀에 자꾸 신경이 쏠렸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불판에 지글지글 익으면서 고소하고 담백한 향이 풍기자 빨리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익은 고기를 소금에 콕 찍어서 먹자, 기름지지 않고 부드러운 식감에 척추가 꼿꼿해졌다. 이번 연수 기간에 먹었던 것들 중 제일 맛있었다. 한 다섯 접시 더 시키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싼 건 항상 아쉬움을 남겼다.


"언니 아까 그거 동그란 고기 이름이 뭐라고? 아맞다 규탕. 규탕, 규탕……"



히로시마의 밤은 깊어가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더니 밖에서 데려온 고기 냄새가 집안에 퍼졌다. 잠깐 머무는 곳이긴 하지만, ‘집’에 왔다는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오늘 일정도 다 끝났겠다, 이대로 고기향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이불 덮고 안경 벗고 누워서 휴대폰 좀 보다가 자고 싶었다. 아까 먹었던 규탕이 꿈에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무라 씨는 ‘설마 벌써 잘 건 아니지?’하는 표정으로 내일 저녁에 있을 한국문화교류회에서 나눠 먹을 호떡을 만들어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밥값을 해야지. 손바닥에서 찐득거리는 호떡 반죽과 코끝을 스치는 계피향. 나는 기름을 묻힌 손바닥에 반죽을 오목하게 만들고 그 안에 오늘을 꾹꾹 눌러 담았다. 투명우산에 떨어진 빗방울, 주머니를 뒤적이며 꺼낸 50엔, 처음 먹어본 고기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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