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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Oct 11. 2022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여유로운 삶

오늘은 여름휴가의 첫날이었다. 

'여름'휴가를 여름에 떠나 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덥고 습한 여름날은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이 최고이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휴가 철마다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가장 바쁜 나날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 해도 예외는 아니어서(다소 의도적이긴 하지만) 시월에 여름휴가를 쓰게 되었다. 


오늘은 춘천에 가려던 계획이라 차를 쓰기로 했다. 3주 넘게 차를 쓰지 않아 주차된 위치를 찾아 헤매다 겨우 차를 발견했다. 차 문을 열려고 다가가는 순간 창문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미안하지만 대리운전기사가 주차 중 실수로 스쳤습니다. 필요시 연락하시라고 대리기사 연락처를 남깁니다. 


포스트잇엔 대리기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한 차주가 남긴 메모 같았다. 주중에는 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주말에만 쓰는 일이 대부분이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 달이 넘도록 주차해 두는 경우가 많아, 방전이 되지 않도록 블랙박스는 꺼두어 사고의 경위를 알 수 없었다. 언제 어떻게 발생한 일인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궁금증을 접어두고 차를 살폈다. 앞쪽 좌측 하단 범퍼에 긁힌 자국이 보였다. 밖으로 나와보니 깊게 긁힌 자국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사진을 찍고 대리기사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전화기는 꺼져있어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춘천에 도착하니 사고를 낸 당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사업이 망하고 난 후 생계로 대리기사일을 해오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 차 사고 전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도 있어 이번 건을 보험 처리하게 될 경우 더 이상 대리운전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하지만 20만 원에 합의를 해 줄 수 있겠냐고, 정말 너무 여유가 없어서 부탁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내 차는 10년이 넘은 SM5다. 우스개 소리로 서민 파이브라고들 하는데, 초보 딱지를 뗀 후 멀리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내 특성상 SUV로 바꿀까 여러 번 고민을 하다,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안타는 차를 또 돈 들여 바꾸지 말고 회사 다닐 때 까지는 그냥 이 차로 버티자 결론을 내린 게 지난봄이었다. 그러고 난 후 내가 혹은 다른 차가 긁은 흔적이 있는 앞 범퍼를 깔끔하게 교체한 지 두 달에 채 되지 않은 상황이다. 새 차는 아니지만 깔끔하게는 타고 다니자고 맘 다졌는데, 옆얼굴에 생채기가 영 거슬렸다. 앞 범퍼를 교체하며 지불한 금액은 대리기사가 합의를 요청하는 금액과는 차이가 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선생님의 상황은 알겠다고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는 내게 그는 대답과 함께 애절한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수리 견적을 받아 청구한다면 그는 보험청구를 하고 대리기사를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20만 원만 받아? 그게 최선일 수도 있지만 다음 순간 그 20만 원이 내게 가지는 가치와 그가 느끼는 가치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만 원 받고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돈이 없어도 내가 사는 일상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가 미치자 오래 고민할 것 없이 대리기사의 목에 걸린 가시 하나를 빼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 바로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 메시지를 남겼다. 사정이 그러시니 보상이나 보험처리는 요청하지 않겠다고, 많이 피곤하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도 하게 되는 게 운전이니 조심해서 하시라고. 

그리고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그분은 약간 울먹이며 고맙다고 했다. 그 울먹임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나에게 이럴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간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대리운전을 한 차주와도 잘 협의가 되시길 바란다고, 힘내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좋은 것을 좋아한다. 이왕이면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가전.... 그렇지만 내가 가지는 '좋은 것'에 내 나름의 기준을 두었다. 좋은 대상이 물건일 경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손상되거나 설령 없어지더라도 내 일상과 인생에 타격을 주지 않을 물건으로 소유하는 것. 나는 차를 좋아하지만 내가 소유하는 차는, 내가 그 차를 유지하는데 드는 보험이나 사고로 인한 비용이 내 일상에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차여야 한다는 것. 누가 내 차를 긁었는데, 공교롭게도 긁은 상대방이 지불 능력이 없는 딱한 사정이라면 내가 눈 감고 지나가도 별일 없을 그런 차. 차뿐만 아니라 다른 소비와 소유의 기준도 마찬가지로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돈도 좋아한다. 돈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긴다. 그런데 그 수준은 나의 빈곤으로 상대방의 힘듦을 지나쳐야만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닐 정도의 풍요로움은 유지하고 싶다. 내가 만약 그 대리기사와 똑 같이 절박함이었다면 나는 그의 절박함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쓰다 보니 이상한 결론이지만 적당히 서민적인 내 차와 또 회사를 열심히 다닌 보람이 함께 있던 하루였다.

더불어 대리기사분의 일상이 좀 더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하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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