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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Mar 19. 2020

알프스를 병풍으로 삼은 멘리헨과 그린델발트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5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에서 묶인 발

여행 3일째, 라우터브루넨의 날이 밝았다.

환상적인 날씨 덕에 융프라우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돌아온 전날 밤이었지만 비 예보 때문에 걱정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유럽의 정상, 융프라우에 서서)

그래도 산악지역에서는 날씨 변덕이 심하니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아침에 눈뜨자마자 제일 먼저 일기예보부터 확인을 했지만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융프라우 : 눈 (강설 확률 100%)

인터라켄 : 비 (강우 확률 100%)

그린델발트 : 비 (강우 확률 100%)

라우터브루넨 : 비 (강우 확률 100%)

오늘 가기로 한 모든 지역에서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변함이 없었고, 오두막집 같은 호텔에서 현관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니 이미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산허리까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던 하늘이었건만 여기가 같은 곳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날은 궂었다.


도시의 유적지나 성당, 미술관을 간다면 비가 아니라 태풍이 분다고 한들 무슨 문제겠느냐마는 산이나 계곡, 트래킹 코스를 갈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더구나 초행길에 등산을 싫어하는 가족을 동반하는 상황이라 더욱 주의가 필요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융프라우를 전날에 다녀왔다는 점에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이미 정해진 시간과 예산은 돌이킬 수 없어 나는 빠르게 오늘의 동선을 정리해 봤다. 일단 비는 변수에서 제외했다. 산에서는 갑자기 구름이 걷히기도 할 것이고, 비만 걱정하다 보면 주어진 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그린델발트의 숙소에 몇 시까지 차를 이동시킬 수 있느냐는 것. 라우터브루넨 호텔의 주인장으로부터는 오후 2-3시까지 주차장에 차를 두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니 나는 그전에 가고 싶었던 곳을 다녀와야 했다.

융프라우 3형제봉(아이거, 묀히, 융프라우)과 그 아래의 두 마을, 그리고 멘리헨(구글 위성사진 캡처, 오른쪽이 남쪽)


내 계획은 오전에 벵엔(Wengen)부터 멘리헨(Männlichen)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간 후에 멘리헨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그린델발트(Grindelwald)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그린델발트에서 피르스트(First) 전망대를 곤돌라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거기서 인터라켄까지 내려갔다가 차를 가지러 출발점까지 오면 융프라우 지역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도는 셈이다.

날씨가 좋았다면 멘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 또는 그린델발트까지 트래킹을 하려고 했는데 기상 조건 때문에 그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알프스의 절경을 따라 걷는 트레킹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융프라우 철도 VIP pass 덕에 이 모든 일정에 추가 교통비는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생과 사춘기 여학생 그리고 체력이 좋지 못한 중년의 아주머니 조합으로 궂은 날씨의 산악 지대에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위협요인이었다. 반나절 안에 이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침 먹으러 가자!'

한 시간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일정을 정리한 후, 배고프다는 아이들과 함께 조촐한 호텔 식당으로 향한 시간이 오전 8시 반이었다. 아담한 호텔답게 식당은 좁고 사람들이 많았는데, 가만 보니 뉴캐슬에서 왔다는 주인장 아주머니가 혼자 주방에서 셰프도 하고 서빙도 보고 난리도 아니다.

어쩐지 아침식사 시간이 달랑 1시간 반만 주어졌더라니, 그녀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운영하는 듯했다. 그래도 스위스 치즈가 풍부하게 들어간 에그 스크램블에 반해 추가 주문을 해서 커피와 즐겼다. 아이들도 그릇을 싹싹 비웠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차에 짐을 실어두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산등성이 위에서는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마을을 비추는데 머리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벵엔으로 갈 기차를 타기 위해 어제 갔던 기차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햇빛과 비가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라우터브루넨의 아침 풍경


멀쩡히 걷던 아이들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면서 일정은 출발 5분 만에 꼬이기 시작했다.

'아빠, 나 신발에서 물이 새는 거 같아요.'

'나도 벌써 양말이 축축해요.'

여행을 다니면서도 일상생활과 별다르지 않은 우리 가족인지라 늘 입던 옷, 신던 신발로 왔는데 아이들의 구멍 난 운동화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던 것.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산에 가는 날인데 호텔 문을 나선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두 아이 모두 양말이 푹 젖어 있다. 등산화는커녕 방수 재킷도 없었으니 비를 예상했으면서도 우리 부부는 이런 것에 너무 무관심한 모양이다.


나는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의 등산용품점으로 들어가 트래킹화와 양말을 새로 사서 갈아 신겼다. 때아닌 아침에 우르르 들어와서 척척 물건을 골라서 계산하는 우리를 보고 가게 주인도 아주 신나 보였다. 로컬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한 것 같은 묘한 만족감마저 들었다.

라우터브루넨의 등산용품점에서 등산화와 양말을 고르고 있는 아이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부모란 늘 너희들의 편에서 어려움을 도와주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고 가르치며, 학교나 일상생활에서 어떤 불편함이나 걱정, 어려움도 바로 이야기하도록 교육해 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 신발에 물새는 것 정도로는 부모에게 투덜대지 못했다. 부모님의 잔소리도 싫었지만 그건 그냥 '참으면서 다니는' 것이었고 신발은 다 닳아 떨어져야 새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만 아프거나 불편해도 엄마, 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고마울 때가 많다. 일을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암튼, 아이들 신발을 기능성으로 사 신기고 기차역에 가니 벌써 오전 11시가 되어 갔다. ‘오늘도 이렇게 반나절이 가는구나’ 싶어 아침에 세웠던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서 대거 수정 중이었다. 그 와중에 변화무쌍한 하늘은 비구름과 파란 하늘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산 위는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비구름이 개고 있는 라우터브루넨의 시내. 등산용품점 앞에서.


아, 멘리헨!

멘리헨으로 올라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벵엔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어제 융프라우를 갈 때 탔던 클라이네 샤이덱행 기차를 다시 타고 산을 올라 벵엔에서 내렸다. 비가 점점 더 강하게 쏟아지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일회용 우비나 겉옷을 챙겨 입고 우산을 들었음에도 몸이 으스스했다.  

점심 먹을 곳이 애매해서 벵엔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Coop 마트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샐러드 박스 그리고 물도 2병 샀다. 전날 융프라우에 갈 때는 기차 속에서 무심코 바라보며 지나쳤던 벵엔인데,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걸어가면서 둘러본 마을은 아담했지만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다.  


벵엔 - 멘리헨 간 케이블카는 40 - 50명은 족히 탈 수 있는 크기이다. 이런 케이블카는 설악산의 권금성에서 탔던 기억이 난다. 비가 많이 내리는 궂은 날씨 탓인지 케이블카 탑승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우리를 포함한 탑승객은 불과 10여 명 남짓이 있었다. 이 날씨에 이걸 타고 올라가는 게 괜찮은 선택인지 케이블카를 타고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멘리헨으로 가는 케이블카 속에서. 궂은 날씨 탓에 썰렁하다.


빗속에 출발한 케이블카 뒤로 벵엔 마을이 빠르게 산 아래로 물러났다. 구름이 마을 위의 하늘에서만 뭉쳤다 흩어지고 있어서 경사진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에서는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였는데, 초록빛 산비탈에 펼쳐진 집들이 레고 블록 장난감 같았다.

벵엔 뒤쪽으로는 계곡의 하얀 절벽이 뚜렷이 나타나면서 그 아래로 우리가 묵었던 라우터브루넨 마을까지도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구름이 휘감고 있는 협곡의 반대편으로는 융프라우에 비해 낮지만 실제로는 백두산보다 높은 쉴트호른(Schilthorn, 해발 2,970m)이 우뚝 솟아 있다.


케이블카가 위로 올라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협곡의 모습이 장관이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높이 오르는지 실감이 났다. 벵엔(해발 1,274m)에서 멘리헨(해발 2,343m)까지만 해도 표고차는 천 미터가 넘는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벵엔의 모습. 멀리 뒤로 라우터브루넨도 보인다.


10분가량 직선으로 산을 오른 케이블카는 멘리헨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케이블카 탑승장 건물 밖은 구름으로 둘러싸여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고, 오로지 멀리서 '딸랑딸랑'하며 울리는 종소리들과 진한 소똥 냄새가 내 청각과 후각을 자극할 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케이블카 안에 있을 때 자기들은 그린델발트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영국인 커플이 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멘리헨의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트레일을 따라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앞서 가던 영국인들도 눈 앞의 안갯속으로 사라져, 잠시 들렸던 도란도란한 말소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길 양쪽에서 간간히 종소리만 요란했다. 갑자기 전날 융프라우에 가면서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보았던 그 소들이 생각났다.

'소 떼가 바로 옆에 있다!!'

거센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하나같이 목에 커다란 종을 달고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구름이 시시각각 끼는 곳이니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종이 요긴하긴 하겠다만 평생 동안 하루 24시간 내내 무겁고 시끄러운 종을 달고 살아야 하는 녀석들이 조금 안쓰러웠다. 자세히 보니 나와 소 사이에는 펜스조차 없었다. 내가 목장 속에 들어와 있나 보다.


풀밭 사이로 난 트래킹 길 위와 주변의 풀밭은 온통 소똥 지뢰밭이라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눈 앞에 풍경의 실루엣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흐르는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은 신비로웠지만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기분은 말 그대로 '안갯속'이었다.

구름 속에서 풀을 뜯는 멘리헨의 소


트레일을 따라 걷던 우리는 얼떨결에 걸음을 멈추고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면서 눈 앞에 넓은 공터의 놀이터와 전망대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 뒤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3대 봉우리와 그 주변의 알프스 산들이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불과 10분 전만 해도 짙은 구름 속에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주변의 풍경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영상 : 구름이 걷히는 멘리헨에서 바라본 융프라우 풍경


름의 움직임은 옛날 지리산을 종주할 때 보았던 세석평전 너머 능선의 운해(雲海)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알프스의 구름은 전혀 다른 형태의 신비로움이다. 4천 미터 고봉들은 2천 미터 봉우리들을 아기처럼 내려다보며 구름을 뿌렸다 걷었다 장난을 치고 있고, 그 가운데 있는 멘리헨 고원에서는 수십 마리의 소들이 각자 목에 걸린 종을 딸랑거리며 무심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멘리헨에서 본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3 대장의 모습


능선 위의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던 아들도, 축축하게 비 맞는 게 싫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사춘기 딸도 구름 뒤로 나온 파란 하늘 배경의 장엄한 알프스에 넋을 잃었다. 구름을 비집고 나온 따뜻한 햇살이 공기 중에 남아있던 물방울마저 빠르게 증발시킨 것인지 폐로 들어오는 찬 공기는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전망 데크로 올라갔다. 낭떠러지를 따라 간단히 펜스를 둘러놨는데 그 아래로는 까마득한 라우터브루넨 협곡을 따라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다.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저 산맥 뒤로 알프스에서 가장 유명한 봉우리 중 하나인 마테호른(Matterhorn, 해발 4,478m)이 있을 것이고, 그 너머가 바로 밀라노로 향하는 이탈리아의 북부 평원이다.

왼쪽의 융프라우부터 뻗어내려 간 알프스 산맥


이탈리아 방향이 라우터브루넨 협곡이라면 북쪽 루체른 방향은 그린델발트 협곡이다. 발걸음을 북으로 돌렸더니 까마득한 협곡 아래 미텔호른(Mittelhorn, 해발 3,704m)을 병풍으로 삼은 그린델발트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파란 하늘 아래 녹다 만 만년설이 살짝 덮인 깎아지른 바위 산을 배경으로 붉은 지붕의 장난감 같은 집들이 좁은 계곡 사이 초원 위에 펼쳐진 풍경은 지금까지 본 어떤 수채화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생각지 못했던 화려한 풍경에 난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사실 올라올 때만 해도 멘리헨은 그린델발트로 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능선 정도로 생각했고, 온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 탓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가벼운 트래킹 삼아 한번 둘러보고는 케이블카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내려갈 생각만 했던 터라 '멘리헨'이라는 이 곳의 지명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한 끝에 겨우 발음할 수 있었을 만큼 잘 몰랐던 곳이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오른 산에서 융프라우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받았으니 여행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갑자기 에펠탑과 모파상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 에펠탑을 극도로 싫어했던 작가 모파상은 매일같이 에펠탑 아래 카페에 가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누군가 모파상에게 왜 싫어하는 탑 아래 매일 오느냐고 물었더니 “파리에서 에펠탑이라는 괴물이 안 보이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 말이다.

물론, 내가 이 일화를 떠올린 이유는 에펠탑을 싫어했던 모파상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융프라우를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은 융프라우 정상이 아니라 바로 멘리헨일 것이다.  


감탄사를 연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새 금방 새로운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잠깐의 천국을 다시 안갯속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필 비상용 보온복을 넣어둔 백팩은 아들이 차에 두고 왔고, 집사람은 추위와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는 가운데 딸은 여행 3일 증후군(가족 여행 3일이 되면 이유 없이 여행을 저주하는 사춘기 특성)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 상태로 그린델발트행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피르스트까지 오르는 일정을 밀어붙였다가는 큰 화를 부를 것 같아 나는 지체 없이 일정 변경을 선언했다. 라우터브루넨으로 돌아가서 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이동하기로 한 것. 어차피 차를 픽업해야 할 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돌아갔더니 그 주변마저 구름이 사라져 아까 보지 못했던 풍경이 나타났다.

멘리헨 능선 위에는 소떼 목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있는 그린델발트행 케이블카 탑승장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낮게 드리운 구름 아래 고원이 더욱 신비로워 보이는 가운데 아까 서 있었던 전망 데크가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본 멘리헨 능선
멘리헨의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바라본 전경


탑승장 앞에 서니 바로 아래 벵엔과 그 밑의 라우터브루넨은 물론 거대한 협곡의 입구까지 멀리 내다 보였다. 초록빛 산맥을 따라 드러난 하얀 절벽은 거인이 산에 남겨둔 큰 생채기 같아 보였고 그 위에서 바람을 따라 흐르는 구름은 더욱 역동적이었다. 날이 맑고 가족들의 컨디션만 좋았다면 두세 시간 정도는 트래킹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다시금 아쉬웠다.

멘리헨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본 협곡의 벵엔과 라우터브루넨


이변은 없었던 피르스트(First)와 반전의 그린델발트

기차를 타고 내려온 라우터브루넨은 여전히 빗속이었다. 호텔 주차장의 차 안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시동을 걸었다. 약 30분가량 빗길을 달려 그린델발트의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린델발트의 아파트형 호텔은 내부가 매우 넓은 데다 깨끗하고 주방까지 잘 갖춰져 있다. 물가가 비싸기로 혀를 내두르는 스위스지만 그린델발트의 숙소만큼은 가장 많이 투자를 했는데 과연 비싼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숙소였던 터라 아내도 아주 만족했다.


다만, 시간이 꽤 늦어졌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인터라켄 건너편의 하더 쿨룸은커녕 피르스트에 다녀오는 것도 불투명한 상황.

‘우리 피르스트까지만 가보자. 곤돌라만 타면 돼’

짐을 풀자마자 나는 불만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아이들을 달래 가며 다시 밖으로 몰고 나섰다.


호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게임을 하고 싶은 아들의 마음은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피르스트는 융프라우와는 달리 해발 2,168m 높이에서 알프스 영봉들의 파노라마를 병풍처럼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포기하기 싫었다.

더구나 정상에는 스위스 럭셔리 시계 브랜드 Tissot이 만들었다는 클리프 워크(Cliff Walk) 즉, 절벽을 따라 걷는 다리가 있다는데 그 위는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비가 계속 오면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을 산 정상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리스크였지만, 멘리헨에서 기적의 하늘을 봤듯 피르스트에서도 비슷한 행운이 나에게 찾아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피르스트의 클리프워크(Cliffwalk) 모습 (사진 출처 : travelrumors.com)


피르스트행 곤돌라 탑승장은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비가 그쳤길래 나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며 아이들을 탑승장 안으로 이끌었다. 이 지역은 유명한 스키 리조트이기도 하므로 겨울이 되면 이 곤돌라를 타고 전 세계의 스키어와 보더들이 눈 덮인 산을 오를 것이다. 그린델발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중간의 슈렉펠드(Schreckfeld)에서 한번 갈아타야 피르스트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산 아래에서는 초록색 들판이라도 넓게 보였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짙은 구름이 산을 감싸고 있었고 슈렉필드에서 내려서 보니 구름 속의 비는 여전했다. 더구나, 멘리헨의 능선과 다르게 이쪽 산에서는 바람마저 불지 않아 구름의 움직임마저 거의 없어 보였다.

'정말 더 올라가야 돼?'

'응, 가보자. 더 올라가면 구름 위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긴가민가 하는 아이들을 달래 가며 환승 곤돌라에 올라탔다.

피르스트로 가는 곤돌라 탑승장. 손님이 거의 없다.


사실은 날씨를 보고 나도 거의 포기한 상태였지만 직접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볼 게 없다 해도 흔들리는 알프스의 곤돌라를 넷이 같이 타보는 재미라도 있을 테니,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었다. 꼭 멋진 풍경을 보는 것만이 아닌 가족과 추억을 함께 쌓는 것이 여행이다.


이윽고 피르스트 정상에 내렸다. 탑승장에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맑은 날에 피르스트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벽에 큰 사진으로 붙어 있었다.

‘와! 원래는 이런 뷰인가 봐!’ 감탄사가 나왔다.

날이 맑다면 피르스트의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 풍경


하지만 현실은 처참했다. 밖으로 나갔더니 멘리헨의 탑승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구름이 끼어 10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까지 흩뿌리고 있는 날씨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아이들이 여기가 맞는지, 도대체 왜 올라온 건지 나에게 물었고, 아내는 혼자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 고집 탓에 따라오긴 했지만 자기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


아쉬움과 민망함이 앞선 나는 혼자 탑승장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바로 눈 앞에 클리프 워크(Cliff Walk)의 실루엣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다면 절벽 위의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저 다리 위를 걸어봤을 텐데 궂은 날씨가 못내 아쉬웠다. 역시 행운의 여신은 두 번 웃어주지 않았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가족들에게 고집을 부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돌아오는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피르스트는 다음에 다시 와야 할 리스트 중 하나로 남겨졌다.

피르스트의 클리프 워크


반전은 그린델발트에서 일어났다.

이 마을은 융프라우 산기슭에서 쌍벽을 이룬다는 라우터브루넨과는 또 다른 인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구름이 걷히며 바로 앞에 웅장한 산들이 병풍처럼 등장하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마을은 양쪽의 높은 산들 사이에 나 있는 계곡을 따라 발달해 있고 산뿐만 아니라 길 건너편의 그림 같은 집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린델발트는 18세기 이후 알프스를 등반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기 있는 관광지로 발달했다. 주변이 4천 미터에 이르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풍광도 수려하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 않았을까.


그중에서도 이 마을의 영산(靈山)이라면 아이거(Eiger, 해발 3,967m)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놔두고 저녁 무렵에 아내와 둘이 잠깐 시내 산책을 했는데, 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 아이거의 봉우리는 신비로움이었다.

그린델발트는 크지 않아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분하면서 세련된 맛이 있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호텔에서 바라본 아이거 산
호텔에서 바라본 그린델발트


한편, 호텔 1층에는 작은 마트가 있어 간단한 장이라도 볼 겸 들어가 둘러보다가 한국산 라면을 발견해서 아주 반가웠다. 라면 하나가 2.9 프랑 즉, 3,700원가량이라 후들후들하긴 하지만 융프라우요흐의 컵라면이 7.9프랑이니 이 정도면 애교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린델발트에서 반가웠던 라면


어느새 비는 그치고 쌀쌀하면서도 상쾌한 알프스의 저녁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또다시 밖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아서 저녁 식사는 비상식량으로 싸온 특별식으로 정했다. 그래 봐야 햇반에 즉석 된장국이었고 아이들은 냉장 포장된 인스턴트 우동이었지만 모두들 최선의 선택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저녁 식사 후에는 캔맥주를 놓고 호텔 테라스 바에 앉아 길거리와 구름이 오가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비가 선물한 여행 중의 쉼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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