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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14. 2024

그녀를 바꾸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연인으로써.

때때로 우주 영상을 보는 것은 나만의 오래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지구로부터 광속의 수백, 수억 배로 멀어지며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는 나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주었다.


8년 전 군인시절 꽤 진지하게 만났던 첫사랑과의 헤어짐 이후로, 7년이란 연애 공백기를 가지며 나는 꼭 안정적인 연애를 하리라는 다짐을 했었다. 그녀는 군인이었던 나를 환승이별로 매몰차게 차버렸고, CC였던 우리는 모두가 아는 공식(?) 커플이었지만 이별 직후 SNS에 남자친구를 게시했다. 당시 슬픔은 인생 30년을 통틀어 가장 처참한 슬픔이었다.


그렇게 7년이 흐른 작년, 첫사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실 그녀의 근황을 대강 알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아나운서를 꿈꿨던 그녀는 실제로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일을 하고 있던 터라, 가끔씩 TV에서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복합적인 감정에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잘 지내냐는 그녀의 DM에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은 했지만, 내 인생 최대의 슬픈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바로 다음 주 식사자리를 갖고 7년간의 근황을 정신없이 교환하였고, 그동안 나 같은 남자가 없었다며 오열하는 그녀의 진심에 나는 그렇게 다시 사귀었지만 우리는 얼마 못 가 또다시 헤어졌다. 재회하고 2주 만에 모임에서 술을 마신 뒤 나와 연락이 두절되었고, 나는 그렇게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상처받은 나의 7년간 되새김질했던 '안정적인 연애'를 하자는 다짐은 예민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또 이러한 다짐의 가장 큰 지분은 나의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순애보 그 자체이다. 술담배도 안 하시며 매일 밤 9시면 잠드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항상 '새나라 어린이'라고 부르셨고,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라고 부르셨다. 걸을 때 손을 잡는 것,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안정적인 톤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 대부분의 시간을 배우자와 가족한테 쏟는 것들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또 부모님이 크게 싸우거나, 욕설과 같은 말을 내뱉은 기억이 전무하다.

대신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서로를 존경한다고 하시며 자랑하셨다.


하지만 철없던 청소년 시절의 나는 온전히 가정에 충실하는 아버지를 보며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앞 문장을 적으면서 울컥할 정도로 너무 부끄러웠던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 노출이 되고 여러 관계형성을 하며 이러한 '안정감'이 나의 큰 기둥임을 깨달았다. 이 기둥은 나에게 확신과 방패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면 "우리 부모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반드시 하게 된다.


'신뢰와 의리'를 매사 강조하셨던 부모님은 배우자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파도 내가 꼭 지켜낸다는 '태도'에 대한 자신이 있을 때 결혼을 하라고 말씀하시며, 결혼이란 결국 나와하는 약속이라고 하셨다. 나도 그게 백번 맞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렇게 올해 새로운 사랑을 했다. 사귀기 전 한 번은 비가 많이 오던 날 그녀는 1시간 거리인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이성이 나를 데려다주는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집에 가까워질수록 오랜 시간 멈춰있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그렇게 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많이 좋아해 주는 그녀 너무나도 사랑했다. 연락이 잘 되며, 예측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록 큰 안정감을 느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딸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 잡히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다가 어느 날 그녀가 연인으로써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더욱이 그 행동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못하는 그녀를 볼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누군가에겐 헤어져도 충분한 사유임에도, 내가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재차 요구할수록 나의 속은 썩어 들어갔다. 정말 비참했다.


재차 요구하는 나를 보며 사과는커녕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면, 우리는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겼음에도, 그녀의 좋은 점이 더 많았기에 내가 그녀를 바꾸면 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 속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반면 다른 이에게 했던 사소한 실수는, 끝내 선물로 사과표현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독립적이고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넓고 얕은 사랑을 위해 애써 본인을 세상에 노출시키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그 태도는 그녀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남 내내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렸던 나이기에, 내가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점점 우리 사이에 신뢰와 의리가 쌓이기는커녕 사라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어느 날 내가 만취한 상태로 그녀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막말을 쏟아부었고, 그렇게 우리는 찰나에 헤어졌다. 그럼에도 정말 사랑했기에 재차 붙잡으면서도 내가 그녀를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붙잡히지 않았다.


연인관계에 있어 나를 버티게 하는 기둥이자 안정감인 '신뢰와 의리'가 너무 예민했던 탓일까, 그런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그녀에게 '나의 상식'이라는 개념으로 쏘아붙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결국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붙잡히지 않은 그녀의 선택이 현명했고, 나는 감정이고 오만했다. 내가 사람을 바꾼다는 생각 자체가 건방진 생각이었다.


그렇게 연인이기 전 한 인간으로서도 누군가를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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