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로 체험장이 된 내 주방
급하게 장을 볼 일이 있어 마트에 도착하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나 필요한 게 있는데 좀 사다 줘. 문자로 보낼게.”
곧 문자가 도착했다. 박력분, 흰 설탕, 베이킹파우더, 버터, 우유, 시나몬 가루 등이 적혀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유튜브를 보고 필이 꽂혔는지. 또 얼마나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그러는지. 잔소리를 하려다가 외출도 못하는 요즘 얼마나 심심하겠나 싶어서 알겠다고 답을 했다.
딸은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간식은 거의 다 만들어 본 것 같다. 초등학생 때부터 탕후루, 머랭 쿠키, 코하쿠토, 달고나 커피 등. 그녀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무척 왕성해서 ‘호기심 천국’, 끝내주게 잘 놀아서 ‘놀이 영재’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수학 영재, 미술 영재도 아니고 놀이 영재라니. 풋.
부탁받은 재료들을 사들고 갔더니 오늘은 시나몬롤을 만들겠다고 했다. 헉! 또 잔소리가 마구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동안 딸을 통해서 인내심 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성숙한 엄마답게 그러라고 했다.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답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절대로 안 도와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거야. 다 만들고 나서 깨끗하게 치우는 것까지 네가 할 일이야.”라고 덧붙였다.
딸은 신나게 유튜브 동영상을 들여다보며 아일랜드 조리대에서 조심스럽게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옆 식탁에 앉아 일을 하면서 딸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 집에 계량 저울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빵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에 제빵 관련 도구는 없다. 제빵은 무조건 중량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딸은 그저 눈대중과 계량컵으로 밀가루와 우유 등을 넣다 보니 반죽이 너무 묽게 되어서 밀가루를 더 넣어 치댔다.
옆에서 지켜본 제빵은 기다림의 작업이었다. 버터를 넣더라도 실온에 한참 놔두었다가 넣어야 하고 반죽을 해서 바로 굽는 게 아니고 1차 숙성, 2차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딸은 점점 지쳐갔다. 오래 서서 재료를 섞고 반죽을 했다. 성격이 급한 딸은 숙성시킨다고 넣어 둔 반죽을 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아직 시나몬 롤을 만드는 과정 중 절반 정도밖에 안 온 것 같은데 딸은 돌연 이런 말을 했다.
“난, 빵은 아닌가 봐. 이쪽으로는 정말 못하겠다. 너무 힘들어. 오래 서있어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순서도 너무 복잡해. 빵이 왜 비싼 줄 알겠어. 이제 그냥 사 먹을래.”
“와~ 그래도 진로체험 하나는 제대로 했네. 제빵 쪽이 적성에 안 맞다는 건 확실히 알았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진로체험이 별거겠나. 집에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알아가는 것도 훌륭하지. 엄마 잔소리에 굴복하고 빵을 만들어 보지 않았다면 제빵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중학교에 입학하면 진로체험을 위해 자유 학기제를 실시한다. 자유 학년제를 하는 학교도 있다. 이번 1학년들은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를 거의 가지 못했다. 당연히 학교에서 야심 차게 준비해 둔 각종 진로체험이나 프로그램들을 할 수 없어 아쉬웠다.
진로체험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일에 소질은 있는지, 무슨 일이 적성에 맞는지 등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역으로 무엇이 맞지 않는지, 어떤 것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지 등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찾아냈다는 면에서 딸은 훌륭한 진로체험을 했다. 남들이 쉽게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일도 많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신이 흥미를 갖는 일은 조금 다른 쪽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반죽의 양이 계획했던 것보다 늘었기 때문에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은 빵이 나왔다. 문제는 우리 가족 모두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예의상 한두 개 정도 먹었다. 빵이 너무 딱딱했고 달았다. 정작 그 빵의 창조자인 본인조차도 한두 개 먹고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결국 시나몬 롤은 며칠 동안 랩에 쌓인 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제 그만하자, 딸아. 넌 이 길은 아닌가 싶다. 오늘의 진로체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