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릇- 다시 만난 빨강머리 앤
여러분은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나요? 네, 바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 말이에요.
살아오면서 가장 큰 착각 중에 하나가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읽은 줄 알았다.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걸. 빨강머리 앤 하면 자동 재생되는 주제곡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아직 어릴 때, KBS에서 <세계 명작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린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방영했다.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읽은 게 아니고 봤다는 것.
아름다운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풍경, 사과꽃 만발한 환희의 길, 창문 밖 벚꽃 가득 안은 눈의 여왕님, 미세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쨍한 파란 하늘, 푸르른 나무와 숲, 초록 지붕에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이층 집. 신기하기만 했던 외국 집의 지하 저장고, 그 안에 가득가득 차 있던 감자, 각종 시럽들, 주스와 과일들. 예쁜 벽지, 앤티크 가구, 그릇, 앤의 방에 서있던 세숫대야 스탠드(더 멋진 용어가 있을 것 같지만), 그 위에 물이 담긴 저그 등 이국적인 모든 장면들에 푹 빠져서 봤던 것이다.
빨강머리 앤의 애니메이션 장면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바로 어제 본 것 같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린 시절에 있던 일은 다 잊은 것 같은데 TV 앞에 앉아 조그만 화면에 비치는 그 장면, 장면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이애나와 맹세하던 개울의 다리 위, 딸기 주스인 줄 알고 다이애나에게 마시게 했던 포도주, 둘만의 숲 속 비밀 장소에서 깨진 작은 찻잔을 놓고 좋아하던 눈물 나게 그리운 장면들. 나는 잊을 수 없는 내 어린 시절의 한 토막, 빨강머리 앤에 관한 굿즈를 일본에서 만났다.
늘 그렇듯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렀다. 거기서 식빵을 한 봉지를 살 때마다 주는 스티커를 다 모으면 앤과 다이애나가 물가의 데크에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접시를 준다는 광고지를 발견했다. ‘저건 받아야지!’ 접시의 그림은 두 종류였다. 일단 더 마음에 드는 접시를 목표로 부지런히 식빵을 사고 스티커를 모았다. 식빵을 매일 다 먹을 수는 없으니 며칠에 한 번씩이었을 거다. 드디어 스티커 판에 스티커를 다 붙이고 의기양양하게 내밀며 원했던 접시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부터 빨강머리 앤에 관련된 스티커나 노트 등, 각종 굿즈들의 붐이 일어났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다. 역시 굿즈의 나라구나. 희귀템을 구했다는 기분에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 매일 꺼내 보며 닦고 어루만졌다. 본차이나도 아니고 울퉁불퉁 전사 프린트되어 있는 싸구려 접시를 세상 어떤 명품 도자기 접시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다. 남은 또 다른 그림의 접시는 내가 다시 스티커를 다 모으기도 전에 품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모두를 가질 수 없었지만 원픽을 가졌으니까 그럭저럭 만족하기로 했다.
그 접시는 지금도 우리 집 수납장에서 숨죽이고 얌전히 들어앉아 있지만 거의 20년 동안 나는 한순간도 그 접시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 마음속, 내 기억 속의 그 어떤 접시보다도 어렵고 힘들게 구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함께 있다니까?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내가 정작 <<빨강머리 앤>>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사실에 살짝 충격도 받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당당하며 고귀해서 안아주고 싶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웃고 감동하고 눈물지었다. 고마운 일에는 고맙다고, 잘못한 일에는 잘못했다고, 미안한 일에는 미안하다고 자신의 입으로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어린아이, 세상에서 가장 자존감 높고 긍정적인 소녀가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다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천진난만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조그마한 여자아이에서 성숙하고 독립적이면서 배려 깊은 멋진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서사였던 것이다. 요즘 회자되는 ‘Love myself. Speak yourself’라는 말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바로 앤이었을 거다.
어릴 때는 그저 예쁜 그림과 이국적인 풍경, 스토리에만 빠져 몽고메리가 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놓쳤던 거다. 하긴 초등학생이 애니메이션을 보며 뭘 얼마나 알아차렸을라고. 그렇게 나는 앤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한편에 자리를 내주고 어른이 되어도 잊지 않고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 나중에라도 알게 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싶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겠는 사람,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이 알고 있는 사람. 나와 맞지 않다고 쉽게 내치지 말고 마음 어딘가에 두고 묵히다 보면 언젠가 진가를 알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앤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시절이었지만(지금이라고 다 안다 말할 수 있을까) 그 접시를 받고 편의점에서 나올 때 받았던 햇살,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기분 좋은 바람은 진짜였다. 그때의 거리 풍경까지 기억날 정도로 행복했던 날이다. 나는 앤과 다이애나가 함께 그려진, 간절히 원했던 그 접시를 얻을 자격이 충분했다. 굿즈가 별거인가. 남들이 보기에는 어디 하나 쓸모없는 예쁜 쓰레기일 뿐이겠지만 내가 좋아서 구하고 보물처럼 여기면 그만이지. 아마 그 접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몇 명 없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후훗.
언젠가 먼 훗날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갈 것만 같다. 내가 그곳에 가지 못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가긴 갈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백발이 된 머리를 염색하지도 않고 그곳에 있는 빨강머리 앤 기념품 가게에서 문구류나 그릇을 쓸어올지도 모른다. 영어도 할 줄 모르는 머리 하얀 한국 할머니가 허리 휘도록 그릇들을 포장하고 있는 걸 본다면 아는 체 말고 그냥 지나가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