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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Oct 05. 2024

[단편소설] 시체가 나타났다 1

점점 미쳐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시체가 나타났다.


월요일 아침, 평소와 달리 발걸음이 무거웠다. 회사에 가기 싫어 죽겠다. 월요병이니 뭐니 하는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퇴근할 무렵 감사부에서 받은 이메일 때문이었다. 간단명료하게 월요일 아침 곧장 감사부로 오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모두 다 김과장 때문이다.


왜 하필 오늘 출장 간 거야?

죽으려면 혼자 죽지. 나까지 끌어들여가지고.


다리 앞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목덜미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제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아침부터 후텁지근했다. 저 멀리 태양이 구름옷을 벗자마자 햇볕을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언젠가 김과장이 날 놀리던 말이 생각났다.


야, 넌 왜 이렇게 까맣게 생겼냐? 까매도 겁나 촌스럽게 까매. 시골에서 밭 매다 왔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옆에 가로수가 만든 좁다란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다. 예전에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서 얼굴이 그리 탔냐고. 걸어서 출퇴근한 것 밖에 없는데 억울했다. 그렇게 낳아놓고는 이제서 도대체 누구 탓.


횡단보도 앞에 있는 다리만 건너면 곧바로 회사가 나온다. 처음 직장을 얻어서 이 도시에 내려왔을 때, 가까운 곳에 남자 혼자 살만한 곳을 찾아보니 강 건너 원룸 촌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있고 상가와 음식점 마트도 가까워서 마음에 들었다. 강변에는 양쪽으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있고, 체육시설과 잔디밭이 있었다. 강 주변에 편의 시설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한강의 축소판이었다. 사이즈뿐만 아니라 사람도 훨씬 적었다. 나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리를 다 건널 무렵 다리 아래를 보니 강변에 노란색 텐트가 세워져 있었다. 기껏해야 성인 두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작은 텐트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소풍 나오다니 팔자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어제 소풍 나온 사람들이 소나기 때문에 접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나 싶었다. 그런데 위치가 이상했다. 다리 바로 밑에는 방금 건너온 큰 강과 만나는 조그마한 지류가 있는데 그 위의 주택가에서 종종 생활 쓰레기가 흘러들어 지저분하고 냄새가 난다. 또한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주변 잔디밭까지 범람해서 잔디 상태도 좋지 못하다. 왜 하필 저런 곳에 텐트를 쳤지? 소풍은커녕 산책하는 사람들도 근처에는 안 갈 텐데.


다리를 다 건너고 회사가 눈에 들어오자 텐트 생각은 머리에서 사라졌다. 손으로 목덜미의 땀을 한번 훔쳐내며 회사 정문으로 들어섰다. 초소 안 경비 아저씨가 손으로 모자를 만지며 인사했지만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감사실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사 생활 5년 만에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사무실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응접실이 있었다. 사무실은 더 안쪽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감사부장 포함 세 명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사부장이 나를 알아보고는 다시 응접실로 인도했다. 중년의 남자였는데 키는 좀 작았지만 체격은 다부졌다. 검붉은 빛깔의 얇은 입술이 특징적이었다. 머리카락은 염색을 했는지 아주 새카맸다.


뭐 차 마실래요? 여기 커피랑 녹차 있어요. 난 녹차 마실 건데.

전 괜찮습니다.


그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녹차 티백을 뜯어 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경찬 대리, 우리 회사에 온 지 얼마나 됐지?

5년 됐습니다.

처음부터 구매부로 발령 났나?

네.

김평수 과장이 사수였고?

네.


감사부장이 사람을 불러놓고 이런 일들을 모를 리가 없다. 인사과에 전화 한 번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인데. 그나저나 어느덧 그는 말을 놓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녹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래처에서 투서가 와서 그래.

···.

그동안 명절 떡값 정도는 챙겨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요구가 왔다고. 금액이 좀 높았나봐. 누가 얼마 요구했는지는 우리도 몰라. 그래도 감사부에서 조사는 해봐야겠지.


나는 아니다. 감사부장 말대로 거래처에서 인사치레 주는 돈은 몇 번 받은 적은 있지만, 직접 요구할 정도로 뻔뻔한 인간은 아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거래처와의 접대 자리에서 김과장이 오랜 세월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걸 일러바쳐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몇 번 그런 자리가 이어지자 거래처에서는 나에게도 돈 봉투를 건네었다. 모두 술에 취했고 분위기에 젖어서 거절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술을 깨고 보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가 만져지는 식이었다. 뭐든지 과하면 탈이 난다고 했던가. 김과장이 선을 넘었다.


야, 회사에서 이런 걸로 문제 삼으면 무조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떼. 알았어? 현금으로 받은 걸 지들이 무슨 수로 찾아내. 이런 재미도 없으면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는 회사를 무슨 낙으로 다니겠냐?


문득 귓가에 술에 취한 김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김과장이 시킨 대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감사부장은 잠자코 녹차만 홀짝거리다 입을 떼었다.


받은 적도 없고, 요구한 적도 없다?

네.

음. 알았어요. 가봐요.


이렇게 금방 끝나나? 그냥 믿어주는 거야? 잔뜩 긴장했던 나는 감사실 문을 열고나오며 허탈했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근데 내내 반말해놓고, 마지막엔 웬 존댓말? 무슨 캐릭터가 저래. 김과장에게 상황을 얘기할까 하다가 내일 출장에서 돌아오면 말하기로 했다.


퇴근길에 다시 정문에서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받았다. 나도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아침에 걸어온 길을 반대로 다시 걸어간다. 다리 아래에 아직도 그 노란 텐트가 세워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도저히 텐트를 세울 위치가 아닌데. 뭐, 내 일도 아닌데 신경 꺼야지.


다음 날 아침에도 출근길에 텐트가 보였다.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밑에 홀로 세워진 텐트가 몹시 이질적이었다. 텐트의 아치형 입구가 마치 ‘너희들은 일해라, 나는 좀 쉬련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괘씸했다. 퇴근할 때 한번 둘러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주변에 쓰레기 냄새가 생각나서 이내 단념했다. 내 일도 아닌데 귀찮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김과장이 자리에 없었다. 항상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인데 없으니 뭔가 불안했다. 컴퓨터를 켜서 일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김과장이 보였다. 그는 나보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감사부에서 어제 너도 불렀냐?

네.

뭐라 그랬는데?

모른다고 잡아뗐죠.

잘했어. 괜찮아. 야, 쫄지 마. 구매부에서 떡값 정도 받는 거는 걔들도 다 알아. 그냥 이참에 좀 길들이려고 하는 거야. 끝까지 잡아떼라. 알았지? 나도 그럴 테니까.

그런데 과장님이 그러셨어요?

뭘?

누가 얼마를 요구했다고 하던데.

난 아니야. 야, 그동안에는 그쪽에서 주니까 그냥 못이기는 척 받은 거지, 요구하긴 누가 요구해. 이 새끼 날 어떻게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가 갑자기 쏘아붙이자 일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구매부에는 김과장과 내가 속한 내자구매과와 다른 두 명이 속한 외자구매과가 있다. 말 그대로 국산품과 외산품을 구매하는 부서들이다. 그 위에 부장님이 계신데 실무는 하지 않으니까 거래처 만날 일은 별로 없을 테고. 외자구매과는 제외하면, 돈을 요구한 사람이 부장님 아니면 김과장이라는 소린데. 여우같은 김과장과 달리 젠틀한 신사 타입의 부장님이 그럴 리가 만무하다.


혹시 부장님이 아닐까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에이 설마.

야,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김과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설마 부장님이 그랬을까. 그는 다른 부서에 있다가 올해 봄 인사이동에서 구매부로 왔다. 입사한지 꽤 되었지만 구매부는 처음이라고 했다. 김과장은 좌천된 거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회사에서 임원까지 키우려고 두루두루 경험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간섭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부원들에게 늘 존댓말을 썼고, 점심은 따로 먹었다.


며칠 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 내심 초조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출퇴근길에 보이는 다리 아래 그 노란 텐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몇 차례 비가 왔는데, 그 탓인지 텐트가 얼룩진 것 같았다. 저러다 비 한번 크게 오면 완전히 망가질 텐데. 문득 나는 이상한 상상을 했다. 혹시 저 안에 시체가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악취가 나는 곳이라서 누구도 가까이 가긴 싫어할 테고. 쓰레기 냄새 때문에 시체 썩는 냄새가 감춰질 것 같은데. 누군가 도시 안에서 시체를 숨기려면 저기 만큼 적당한 곳이 있을까? 버려진 텐트를 누가 수거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2주나 지났는데 그대로 있잖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말, 감사부에서 거래처 사장들과 면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돈을 직접 요구한 적은 없지만, 그동안 인사치레 받은 돈을 문제 삼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몹시 초조한 나와 달리 김과장은 평소처럼 태평한 모습이었다.


감사부 놈들 참 열심히도 한다. 별 일도 아닌 것 같지고.


감사부의 조사가 지난 2주간 잠잠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부장님이 거래처 명단 넘기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부장님이 감사부장 보다 선배여서 가능했지만 이후로 더 윗선에서 조정이 있었나보다. 나는 부장님이 부원들을 감싸주려고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과장은 문제가 생기면 임원 승진에 차질이 있을까봐 그러는 거라고 말했다.


감사부에서 우리 거래처들 조사하는 사안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할 게 있나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믿습니다. 가보세요.


우리는 서로 합이라도 맞춘 듯 한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나는 부장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짓으로 답한 것 때문에 마음 아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실직고할 수도 없었다. 부장님의 언행으로 봐서 돈을 요구한 사람은 바로 김과장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이미 김과장과 한 배를 탄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김과장과 회사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면 모두가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인 채 후딱 먹고는 자리를 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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