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소설집 1,2>
오래 전, 돈키호테 소설을 읽으려고 집어들고서 책장을 펼치자 마자 빠져들었다.
소설 내용이 아니라 작가 세르반테스의 현란하고 유쾌한 말솜씨에 먼저 넘어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글은 눈으로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읽는다기 보다 바로 옆에서 말해주는 걸 듣는 것 같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허풍과 너스레, 풍자를 섞어서
들려주는데 그 표현과 묘사가 재미있고도 생생한데다 형식도 자유롭다.
작가의 활동시기가 1600년대 초인걸 감안하면 문체가 현대적이다 못해 포스트모던한 느낌까지
있어 읽을 때마다 그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모범소설집 1, 2> 는 말 그대로 사회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소설을 쓴 것이다.
<돈키호테> 1권과 2권 사이에 나온 책인데 나는 제목이 풍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모범소설로 아름답고 정숙한 여성에 대한 찬양, 지체 높고 행실 바른 귀족에 대한
미화 등의 내용이 많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풍자는 빠지지 않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1600년대 스페인 사람들의 삶과 풍습, 당시 사회의 모습 등을 세세하게 전해들을 수 있다. 작가의 빼어난 말솜씨는 우리를 그대로 타임슬립시켜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는 소설을 내기 위해서는 여러 공적인 기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아라곤 최고회의 관계자들의 위임을 받은 허가증에서 '이 책은 풍성한 언어와 놀라운 창의력이 어우러져 가르침과 감탄을 더하니, 이로써 우리 언어가 보잘것없고 풍성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우리 에스빠냐어의 적수들에게 우리 어휘의 풍성함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라는 극찬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의 말 '아무 힘도 없으면서 약속이 많습니다. 지금의 저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누가 이 욕망에 고삐를 달겠습니까? 이 점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설을 저는 감히 위대한 레모스 백작께 바치기로 했으니, 이 소설들에 이것들을 쓰게 한 신비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기를 바랍니다...하느님께서 독자님과 저에게 가호를, 그리고 네댓명은 넘을 교활하고 빤질빤질한 자들의 저에 대한 험담을 듣고 참아낼 인내심을 주시기를. '라고 쓰고 있다.
모두 12 편의 이야기 중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유리 석사에 관한 소설><질투 많은 에스뚜레마두아 노인의 소설>이 특히 흥미로웠다. 사람 말을 하는 개들이 주인공인 <개들의 대화>도 그 형식이나 내용이 눈에 띈다.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
너무나 아름다워서 누구라도 한눈에 빠져들게 되는 매력을 지닌 집시 소녀 쁘레시오사.
그리고 그녀에게 빠져들어 귀족이라는 신분을 집어던지고 집시 생활을 함께 하게 되는 귀족 안드레스의 이야기.
정숙하지만 매력적인 쁘레시오사를 믿으면서도 여러 상황으로 인해 질투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되는 안드레스. 안드레스를 사모하는 여인의 계략으로 안드레스는 도둑 누명을 쓰고 사람을 죽이는 처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소설은 스토리도 사람의 감정을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드는 데 집시 사회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묘사가 귀하다.
'집시 여자나 집시 남자들은 오직 도둑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 도둑 부모에게서 태어나 도둑들과 함께 자라고, 도둑 수업을 받고, 마침내 어디를 가나 어느 순간에나 잘나가는 보통의 도둑들이 되고 마니까...' 로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집시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나이보다 앞서가지요. 집시치고 바보 없고 집시 여자치고 미련퉁이는 없어요. 집시들은 먹고살려면 예리하고 약삭빠르고 속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발자국 하나 옮길 때마다 머리를 잘 쓰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절대 머리에 곰팡이 필 시간이 없지요.' 는 대목은 살아남기 위해 영민해야 하는 집시들의 생활을 보여주고 '산은 우리에게 장작을 공짜로 주고, 나무는 과일을, 포도밭은 포도를, 밭은 채소를, 샘물은 마실 물을, 강은 물고기를, 사냥 구역은 사냥감을, 바위는 그늘을 주고, 바위 사이 갈라진 틈은 시원한 바람을 주고, 동굴은 집을 주지.' 에서는 집시들의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유리 석사에 관한 소설]
개인적으로 소설의 전개에 감탄을 연발한 작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하던 또마스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인의 모략으로 잘못 먹은 음식 때문에 6개월 동안 병석에서 지내다가 뼈만 남은 상태가 됐다. 더 심한 것은 이때부터 자신의 몸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하게 되어 누가 자신에게 닿기만 해도 괴성을 질렀고 자신의 몸이 깨질까 두려워 짚풀 위에서 잠을 청했다.
이때부터 이 유리석사는 ' 자신은 살이 아니라 유리로 된 사람이어서 무엇이든지 훨씬 더 지혜로운 답을 줄 수 있는데, 유리라는 것은 섬세하고 현묘한 것으로 지상의 무겁고 육체적인 물질이 아니므로 영혼이 유리를 통하면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궤변을 내세우며 사람들의 질문에 거침없이 답을 했다.
이 답의 내용들이 재미있다. '꼭두각시놀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것들을 품위 없이 다룬다고, 떠돌이 양아치들이라고 수천가지 욕을 해댔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꼭두각시 인형들은 성스러운 기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흔히 가마니에다가 구약성서, 신약성서, 인형들을 한꺼번에 다 집어넣고 다니며 술집이나 술창고 같은 데서는 그것을 깔고 앉아 먹고 마시며 볼일 다 보기 때문이라고, 힘 있는 기관에서 어떻게 이런 인형극을 영원히 입 다물게 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추방하지 않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이 부분은 마리오네트의 역사를 살펴본 내게 더 관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마리오네트 자료를 찾다보면 '원래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시작된 마리오네트가 교회 밖에서 거침없는 풍자와 선정성으로 더 인기를 끌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세르반테스는 소설에서 이렇게 당대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소설 전반에 걸쳐서 ( 이 부분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비슷했다.)남의 말 하는 사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빼먹지 않는다. '유리로 되어 있는 몸을 말벌이 쏘니까 그 느낌이 어떠냐고 한 사람이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 그 말벌은 남의 험담꾼인 것 같다고 했다. 험담꾼의 혀와 입은 유리가 아니라 청동으로 된 몸이라도 부서뜨릴 힘이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는 또 험담꾼의 혀는 독수리의 깃털과 같다고 말했다. 그 주위에 모인 다른 새들의 날개를 뜯어먹거나 떨어뜨리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괴한 생각에 빠지고 행동하던 유리 석사는 다른 사람들의 안쓰러움을 사는 동시에 엄청난 인기도 누리게 되어 왕실에까지 불려간다.
하지만 결말은 다소 허무한데 그는 "오 궁정이 있는 수도여, 이곳을 사랑하는 만용의 구애자들의 희망을 길러주고 소심한 실력자들의 희망을 갉아먹는 도시여, 철면피 건달들을 풍성하게 먹여살리고 염치를 아는 점잖은 자들을 배고파 죽게 하는 도시여!"라고 한탄하며 자신의 배움을 버리고 군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스타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지금, 더 와닿는 대목이 많은 내용인데 이 내용을 담아 풀어내는 이야기가 풍성하다.
[질투 많은 에스뜨레마두라 노인에 관한 소설]
에스뜨레마두라라는 고장에 살던 귀족 가문 출신 까리살레스는 (세르반테스는 까리살레스라는 이름 옆에 '이것이 우리 소설에 소재를 제공한 주인공의 이름이다.' 라고 적었다. ) 48세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20년 동안 엄청난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 결혼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터에 길을 가다가 열서너살의 아름다운 소녀 레오노라를 만났다.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레오노라와 결혼하게 된 까리살레스. 이 결혼은 굉장한 행운이었지만 까리살레스는 질투로 스스로를 가두었다.
'이 아름답고 어린 신부를 지켜야 겠는다는 질투에 사로잡힌 까리살레스는 집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든 것은 물론 집안의 시중을 드는 사람은 모두 여자만 두었다. 사람들은 '그는 낮에는 생각하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았어요. 그는 그 집의 야경꾼이고 보초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눈이 100개인 아르고스였지요. 남자라고는 마당 안쪽으로 들어온 일이 없었습니다.' 라고 전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우연히 레오노라의 아름다움에 대해 듣게 된 로아이사의 계략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이 소설의 끝부분에 '이런 일을 거울삼아 열쇠나 회전문, 담벼락을 믿고 자유로운 마음을 막으려는 생각은 말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지요. ' 라고 밝히고 있다.
생생한 현실을 빠짐없이 묘사하고 반영하면서도 자유로운 상상력과 문체. 이렇게 재미있는 고전 작품이 있을까.
세르반떼스 소설은 만화책처럼 읽히는 측면이 있어서 나는 소설을 읽어내려가며 그 말장난에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전쟁 중의 부상으로 인한 왼팔의 장애, 해적에게 납치되어 시작된 5년 간의 포로 생활, 은행 파산으로 공금횡령죄를 뒤집어 쓴 채 시작한 감옥생활. <돈키호테>는 그 감옥생활중에 시작되었다. 파란만장했던 작가의 삶은 이렇게나 뛰어난 소설의 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