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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May 13. 2024

천 년 넘게 떠돌며 지켜온 정체성

<집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를 읽고

집시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산 책인데 이건 책이 아니라 논문 수준이다.

읽을 땐 복잡하고 정보가 필요보다 많다는 생각도 했지만 충실한 자료와 정보는 집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집시에 관한 한 이렇게 세세하면서도 방대한 내용을 다룬 책이 있을까,

다 읽고 나니 보배같은 귀중한 책이라 여겨지고 새삼 이런 귀중한 책을 내 준 출판사가 고맙게 느껴졌다.


우리가 아는 집시의 기원은 어디일까. 저자는 1989년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기본 정의를 알려준다.


 집시(gipsy, gypsy) : 방랑하는 인종 (자칭 로마니 Romany)의 구성원. 기원은 힌두 사람. 16세기 초반 무렵 영국에 처음 등장했고, 당시에는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여겨졌다. 피부는 짙은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 바구니 제조, 말 매매, 점술 등을 생업으로 하며, 유랑생활 및 습관 때문에 대부분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언어(로마니어로 불린다)는 대단히 변질된 힌두어 방언으로, 유럽 각지의 다양한 언어와 혼재되어 있다.


'이집트인'을 뜻하는 '집시'로 불리지만 인도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서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에 등장한 것은 16세기 초반이지만 집시로 여겨지는 사람의 기록은 훨씬 오래전에 등장한다.


아랍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5세기경 페르시아의 군주 바람 구르는 신하들에게 하루에 반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음악 소리에 맞춰 먹고 마시라고 명했는데 신하들은 술만 마시고 음악을 즐기지 못했다. 왕은 음악을 무시한다고 꾸짖었고 신하들은 음악을 연주할 악사를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페르시아 군주가 인도 왕을 설득해 1만 2,000명의 악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해 이들이 전역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실제 페르시아에는 조티(Zotti, 복수형은 조트)와 루리(Lu li)라는 이름의 인도 방랑민이 10세기 이전에 자리잡고 있었고 집시를 가르키는 페르시아어가 '루리'이다.


또 역사 기록으로는  비잔틴 제국이 시리아를 공격한 855년, 상당수의 조트가 포로로 잡혀 아내와 자식, 들소들과 함께 끌려갔다고 한다. 다만  조트라는 명칭이  인더스강에서 기원한 다양한 집단에 대해 거의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이들이 모두 집시를 뜻하는 것인지가 확실치는 않다.


 1068년 <아토스산의 성인 게오르그의 생애>라는 그루지야어 성인전에는  이때 이미 콘스탄티노플에 집시가 살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내용이 있다.

'1050년,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필로파시온 왕실 수렵장에서 사냥감을 먹고 있던 야생동물에게 쫓김을 당했다. 그는 '마술사 시몬의 자손으로, 점과 마술에 능하며 아드신카니Adsincani라 불리던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청했고, 이들 아드신카니는 마법을 건 고기 조각으로 즉시 그 사나운 야수들을 죽였다. '


 이 책에서 사용된 아드신카니라는 명칭은 비잔틴에서 일반적으로 집시를 가리키는 용어였던 그리스어 아칭가노이Atsinganoi가 그루지야어로 표현된 것이다. 독일어 찌고이네르Zigeuner, 프랑스어 치간느Tsiganes, 이탈리아어 칭가리 Zingari, 헝가리어 치간요크Cigányok, 그리고 그 밖의 몇 가지 언어로 표현된 비슷한 형태의 말들은 모두 이 비잔틴 명칭에서 파생된 것이다고 저자는 말한다.


1323년, 크레타섬의 칸디아(이라클리온)를 방문한 프란시스코회 수도사 시몬 시메오니스는 집시로 보이는 민족에 대해  '거기, 도시 외곽에서, 우리는 그리스의 의식을 따르는 자칭 챠임(햄)족을 보았다. 그들은 한 장소에 30일 이상 머무르는 법이 없이 방랑을 계속한다. 신의 저주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30일째 되는 날이면, 아랍인의 천막과 비슷한 검고 낮은 타원형 천막과 함께 이 들판에서 저 들판으로, 이 동굴에서 저 동굴로 떠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아는 집시의 특성과도 일치한다.


이렇게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콘스탄티노플과 크레타섬까지 진출했던 집시들은 15세기를 전후해 서유럽으로 가게 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때 집시들은 자칭 순례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1417년, 많은 수의 집시들이  중앙 유럽과 서유럽에 그들이 도착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집시들은 순례자 집단으로 나타나 원조를 요구하고 획득했다.


1497년 독일 쾰른의 아놀드 폰 하르프가 쓴 상세한 설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갈대 지붕을 얹은 작은 집에 가난하고 벌거벗은 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대략 300가구 정도였다. 그들은 집시라 불린다. 우리들은 독일 땅을 여행하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온 이교도라 부른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한다. 이를테면, 구두  제조, 구두 수선, 금속 세공 등이 그것이다. 땅 위에 모루를 놓고 재단사처럼 그 위에 앉은 남자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다. 그 남자 옆의 불을 사이에 두고 그의 아내가 역시 땅 위에 앉아 실을 잣고 있다. 그들 곁에는 백파이프 같은 작은 가죽 자루 두 개가 있는데, 반쯤은 불 옆의 땅에 파묻혀 있다. ....이 사람들은 모돈 마을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지페 출신이다. 이곳은 지난 60년 전에 투르크 황제의 지배에 들어갔지만, 후작과 백작 일부는 투르크 황제를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안녕과 지원을 찾아 우리나라, 로마, 우리 교황에게로 도망쳤다. 그런 이유로 교황은 그들에게 추천장을 주어 로마 황제와 제국의 모든 군주들이 기독교의 대의를 찾아 떠나온 그들에게 안전통행증을 주고 보호하게 했다. 그들은 이 추천장을 모든 군주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은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그 추천장들을 하인과 아이들에게 남겼고,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독일 땅을 떠돌면서 소이집트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의 부모들이 수기닌 Suginien 이라 불리는, 지페라는 땅에서 태어났고, 지페는 이곳 쾰른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의 반도 안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방랑자들은 악당이자, 이 땅을 염탐하는 스파이다.'


아놀드 폰 하르프는 꽤 상세히 관찰을 했고 그들에 대해 많은 걸  꿰뚫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 당시 종교의 영향으로 순례자에 대한 사회분위기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던 듯 하다. 특히 집시 집단에는 공작 혹은 백작을 칭하는 지도자가 이 무리들을 이끌었다. 당시 집시 집단은 신앙을 버리고 이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행으로 주교의 명에 따라 7년간 외국 땅을 떠돌아다닌다는 말로 호감을 얻었고 실제 왕의 추천장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1421년 프랑스 부르고뉴 아라스시 참사회 기록에는 30여 명의 집시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이들은 황제의 추천장을 지닌 백작의 인솔로 1421년 10월 11일 이곳에 도착하여 사흘동안 머물렀는데, 밤이면 입은 옷 그대로 들판에서 잠을 잤다. 남자들은 피부가 아주 검었고, 긴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반면, 여자들은 터번같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고, 짧은 슈미즈 위에 결이 성긴 천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차림새는 동시대 유럽의 패션과 전혀 달랐는데, 놀란 시민들은 그들에게 상당량의 맥주와 석탄을 주었다. '


집시들은 이때부터 손금과 점을 봐주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마차를 수리하는 등의 일을 했었는데  프랑스 파리의 한 주교는 점쟁이와 손금을 보러 가는 사람 모두에게 파문을 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중앙 유럽과 서유럽에 먼저 진출했던 집시들은 1430년대 이후 차츰 동유럽으로 향했다.

독일 바이에른 연대기에 실린 1439년의 기록 '이 해에 투르크 제국과 헝가리 국경 지대에 살던 다양한 인간들의 잔재인 그 도둑 종족 (찌게니 Zigeni라고 불린다)이 친델로라는 왕의 인솔 아래 우리나라 각지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둑질과 강도, 점 등으로 무난히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왔고, 신들의 뜻에 따라 유랑을 하게 되었다는 거짓 주장을 늘어놓으며, 뻔뻔스럽게도, 선조들이 성처녀와 그 아들 예수를 외면한 죄를 7년간의 유랑으로 속죄하고 있는 체 한다. '


연대기에서도 보듯 집시들에 대한 호의는 계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집시들의 손금과 도둑질, 집단 생활이 문제가 되면서 많은 나라에서 스파이로 몰며 추방 포고령을 내렸다. 신성로마제국도 1497년 의회에서 집시를 스파이라고 비난하고 추방 조례를 제정했다.


하지만 이 많은 조치에도 집시들의 추방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로 집시를 불렀고 손금과 민간요법, 금속세공 기술, 그리고 음악의 분야에서 집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러는 그들의 독특한 패션을 따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집시의 음악적 능력은 대단해서 모데나 공국에서는 1469년 치톨레를 연주한 '칭가노'(집시의 다른 표현)에게 돈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헝가리에서는 집시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는데 특히 헝가리 집시는 악사로서 평판을 얻었다. 1489년 왕비를 위해 연주한 집시 악사의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1543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궁정에서는 "이집트인 악사들이 매우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다"며 평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순례자 행세를 하며 유럽을 떠돌던 집시의 수는 1520년대에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확대되면서 집시들은 위기에 처했다.


순례자의 지위가 예전같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시들의 주 전략이었던 '구걸' 역시 엄한 규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노동력으로서도 쓸모가 없는, 뿌리도 없고 주인도 없는 사람들로 규정된 집시들은 처벌되거나 추방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유럽 각국은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 이들을 추방했는데 이 시기에는 죄 자체에 비해 더 엄한 벌을 받기도 했다.


1711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제정한 포고는 '4주 이상 머무르는 집시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더 이상의 절차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등에 낙인을 직은 뒤 제국 관구 전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고 정했고 국경에 설치된 특별 간판에는 '집시의 형벌'이라는 설명과 함께 집시가 채찍질당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했다.  1725년, 프러시아 2대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포고에 따르면 18세 이상의 집시는 성별과 무관하게 재판 없이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보름스, 마인츠의 대성당참사회는 ' 집시를 비롯한 방랑 도적도 '결국은 사람이며, 그런 법령으로는 이 세상에 살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스페인  필리페 4세는 1633년, 대략 '자칭 히타노들은 태생적으로 또는 천성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사악한 목적을 위해 그러한 생활 방식을 택했다.'는 내용의 프레마티카(prematica, 국본조서)를 반포했다. 집시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개최하거나 일반인들과 다른 옷을 입을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했으며 늘 함께 모여있곤 하던 바리오(집시 구역)에도 살 수 없게 하는  대신 다른 주민들과 섞여 선량한 기독교인으로 살도록 했다. 페르디난드 6세 시기인  1746년 세빌리아에 최대의 집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포르투갈은새로운 추방 수단으로서 해외 식민지로의 유형을 행한 최초의 국가였다.  쥬앙 3세는 1538년 포고를 통해 포르투갈 태생 집시들을 아프리카 식민지로 유형보냈다.


이후 집시는 용병으로 보내진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1790면  집시들을 병사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집시가 관용을 얻거나 감옥으로부터 석방되고 운이 좋으면 우대 조치까지 기대할 수 있는 하나의 도피처가 바로 군이었다.


집시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극도로 안좋아졌을 때는 집시에 대한 추방과 절멸 등이 공공연히 거론돼고 엉뚱하게 식인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그런 집시들이 또 18세기 낭만주의의  사조와 함께 다르게 다루어졌는데  작가들 사이에서는 집시의 생활을 일상적 존재의 허위와 대비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기도 했고  이국적이고 신비한 것을 편애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그들의 춤, 음악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집시의 문화가 엄청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웨일즈에서는  18세기 초반에 바이올린을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는 집시 족장 에이브람 우드가 환대를 받아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웨일즈의 국민적 악기인 하프로 전향한 뒤 거의 모든 곳에서 환대받았다.


집시의  타고난 연주 능력은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았다.  19세기에는 특히 세 나라-헝가리, 러시아, 스페인-에서 직업적 음악가로서 탁월한 지위에 올라, 거의 국민적 아이덴티티의 일부를 구성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헝가리에서는 오래 전에 정착한 집시 (로문그레 romungre) 다수가 악사로서 인기를 얻었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그들만의 자연스런 신선함과 즉흥적인 편곡 능력은 헝가리인 청중을 만족시키는 마르지 않은 원천이었다. 이때부터 금속 세공보다 음악 연주가 집시 최고의 직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최초로 이름을 알린 위대한 음악가는 포츠니(브라티슬라바) 군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야노스 비하리(1764~1827)였다.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전국 어디서나 중요한 축제와 연회에 초대받았다. 비하리와 그 후계자들은 베르분코스 verbunkos 스타일로 알려진 음악 양식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헝가리 민족음악의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리스트는 비하리의 최대 찬미자 중의 하나였다.


러시아인들은 집시의 음악적 매력을 노래에서 찾았다. 18세기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집시 가수들을 몰다비아에서 모스크바로 데여온 것이다. 이윽고 집시 합창단과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명문 귀족의 저택에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장식품이 되었다. 오를로프의 함창단은 엄청난 유행이 되었고, 카타리나 여제의 총신들이 개최하는 야회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집시 음악'은 19세기 러시아 음악 문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기까지 했다.


스페인 플라멩코도 집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안달루시아의 음악을 기초로 발전했지만비잔틴 전례와 아랍 및 집시의 요소가 혼합된 것이었다.  격렬하게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노래에는 본래 리드미컬한 박자 소리 외에 반주가 없었다. 그 후 기타와 춤이 등장하여 칸테를 풍부하고 힘차게 만들었고, 마침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플라멩코로 확장되었다. 필리페 4세와 카를로스 2세의 포고 같은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집시는 집시 고유의 사회에 집착했는데, 그로 인해 다수의 기타네리아(집시)가 생존할 수 있었고, 안달루시아 문화에도 현저하게 기여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서유럽 집시들은 차츰 바르도vardo라 불리는 주거용 사륜마차로 거주지를 바꿔가고 있었는데 집시 포장마차는 개성적이고 기능적인 것은 물론 모양도 좋아서 널리 발전하게 되었다.


20세기 집시에 대한 유럽의 인식은 다시 나빠졌고 특히 인종우월론이 싹트면서 집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됐다. 프랑스에서는 고비노 백작이  <인종의 불평등에 대하여>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인종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결정 요인이라고 주장해  유럽, 특히 독일의 철학과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뒤이어 체사레 롬브로소의 <범죄자>는 범죄의 격세유전적 기원을 강조했다.


1926년, 프로 유벤투테 재단은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과 진화론에 근거해서 '예니쉐(이동생활자)'의 아이들을 사회 본류에 합류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어디에든 정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시 아이들을 부모의 동의도 없이 데려와 이름을 바꾸고 양부모의 집으로 보내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1912년  모든 집시에게 '신체 특징 수첩'의 휴대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해 개인당 하나씩 소지하도록 강제했고 이 제도는 6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은 집시를 가만두지 않았다.  1940년 4월,  2,500명 가량의 집시가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 서부와 북서부에서 폴란드로 이송되었고, 가을에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집시도 뒤를 따랐지만, 수용소와 게토에서 죽었다. 1941년 12월에 폴란드의 외딴 마을 근처 죽음의 수용소 켈므노에서는 트럭에 실린 일산화탄소 가스를 사용하여 폴란드에서 체포된 집시를 죽였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집시 수용소는 17개월간 존재했다. 거기에 갇히게 된 2만 3,000명의 집시들 가운데 2만 78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사인은 기아, 과로, 인체실험, 질병, 가스 등이었다.


또 세르비아의 점령지에서는 집시가 인질로서 조직적으로 이용되었다.   매일같이 총살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된 독일인 한명당 100명, 부상자 한 명당 50명이 살해당했다).


이렇게 전쟁 중 유럽에서 죽은 집시 희생자의 수는 25만 명에서 50만 명, 또는 그 이상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전쟁의 비극 한가운데 놓였던 집시들의 여건은 조금은 나아지는 듯 보였다.


네덜란드는 1977년  정부가, 의회의 압력하에  불법체류 외국인 집시들 중 일부인 450명의 체류를 합법화하기로 했다. 소련에서는  1925년에  집시가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았고, 신분 증명서와 국내 패스포트에 '치간'이라고 기재될 수 있었다. 폴란드는 1950년대 초반 이래로  유동 집시에게 주택과 직업을 주는 것으로 통합을 추진하려 한 최초의 국가였지만 1980년대가 되자, 새로운 주민과 지역 주민 사이에 분쟁이 빈발해 수백 명의 집시들이 시민권도 없는 상태로 폴란드에서 추방당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시는 1981년, 알바니아인, 헝가리인, 투르크인 등의 소수민족과 마찬가지 조건으로 헌법상의 '민족'지위를 인정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순례자의 가면을 쓰고 서유럽에  온 집시들이 19세기에 실제로 순례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기적으로 루르드를 포함한 프랑스의 여섯 개 남짓한 성지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등의 성지로 가는 집시 행렬이 목격되고 있다.


 옛부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매년 5월 24일과 25일에 까마르그 지방의 레-생트-마리-드-라-메르에서 개최도는 축제. 집시의 수호성인으로 선택된 '성녀'사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기적적으로 론강 하구에 온 것으로 믿어지는 예수의 숙모, 마리 쟈콥과 마리 살로메의 이집트 시녀였다.


19세기 중반  레 - 생트-마리의 순례자들 속에서 집시의 모습이 목격되더니 최근에는 축제가 시작되는 처음 이틀간 그들의 모습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영국에서는 매년 열리는 복음 전도 집회에 수천 명의 이동생활자가 모여든다. 최초의 30년 동안, 집시 복음교회는 7만 명 정도의 집시를 개종시켜 세례했고,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을 모임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집시 남성 1,600명이 전도사가 되었고, 그 가운데 400명은 목사였다.


프랑스에서는 오늘날 이 운동으로 인해 집시 인구의 3분의 1을 신도로 확보했다고 한다. 집시 복음 교회는 서유럽 최초로 부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집시를 포괄하는 대중 조직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후 많은 집시들이 희생당했지만 집시들도 이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71년 4월, 국제 집시 위원회가 주최한 최초의 세계 로마니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어 14개국 대표가 참석해다.

이 회의에서는 집시들은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롬'을 지정하고, 민족기와 단순명쾌한 슬로건-오프레 로마!(집시여 일어나라!)-을 채택했다.


수세기라는 오랜 시간 동안 방랑을 계속하고 무수한 억압과 고난에 놓이면서도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지켜온 집시의 적응력과 생존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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