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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22. 2021

주황색이고, 흐릿하고, 따뜻한 아메리칸드림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우리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보스턴의 밤은 주황색이고, 흐릿하고, 따뜻하다. 강을 따라 이어진 벽돌 건물들,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유리 건물들로부터 주홍색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한때는 누군가의 저택이었을 건물들은 그 내부가 조각나 원룸으로 개조된 지 오래다. 먼 곳에서 찾아와 월세를 내며 사는 이방인들은 밤마다 방으로 돌아와 불을 밝힌다. 외로움과 슬픔, 먼 곳에 두고 온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 푸른색으로 빛날 터이지만, 그런 색은 창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을 채우고 있는 시퍼런 우울은 서로에게 닿기 전 길게 늘어져 변질되어 버린다. 날카로운 감정들은 모두 무뎌져 주황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다 함께 꿈처럼 아름다운 보스턴의 야경의 일부가 된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다. 직항으로는 14시간, 1번 환승을 하면 20시간, 돈으로 따지면 한 달 월급의 절반이 넘게 드는 길이다. 이곳에서 겪는 모든 감정을 그 모습 그대로 가슴속에 품은 채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남겨둘 수는 없다. 그것들이 내가 떠난 후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몹시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그 위에 주황색 곰팡이가 가득 펴 더 이상 변질되지 않을 추억들만을 꺼내놓는다. 머릿속에서 지나치게 오래 굴려대어 모서리가 모두 뭉툭해진 것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위대한 아메리칸드림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바다 건너편에 전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우리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저 먼 곳에서 바라보는 보스턴의 밤은 영원히 주황색일 것이고, 흐릿할 것이며, 따뜻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말만을 남기는 나 자신이 애처로울 때가 있다. 때로는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주황색 빛 안에서 길을 잃은 채로 부드럽고 몽롱한 것들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 지어낸 세상이 지나치게 편안하고 부드러워 붙잡은 손을 놓아버린 채로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기에 나는 글을 쓰려고 한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기억들이 무뎌져 버리기 전에, 그 기억들이 여전히 파란색일 때 그 안에 있는 감정을 꺼내어 글자들 사이에 박제해두려고 한다. 꿈속으로 아무리 깊이 가라앉더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올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나치게 아름다운 보스턴의 야경 위로 파란색 선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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