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an 02. 2023

눈 내린 다음날 보스턴 수목원에서 한국을 찾다

단풍나무, 소나무, 미국 사람이 없는 곳

그 해 보스턴에는 눈이 일찍 내렸다. 나는 Orange line을 타고 남쪽에 있는 수목원 (Arnold Arboretum of Harvard University)으로 향했다. 눈이 몹시 귀한 남쪽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서 눈 내린 다음 날 수목원의 풍경은 꽤나 자극적이었다. 아직 가을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은 나무 위에 쌓인 눈이 투둑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눈덩이들, 그리고 눈이라면 익숙하다 못해 이골이 났을 보스턴 사람들 사이로 나는 마치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와 익숙한 것처럼 걸었다. 입가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점잔 빼며 걸었다.


산책로 왼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단풍나무 (Acer palmatum) 하나가 보였다. 수목원에 오기 전 미리 점찍어두었던 동아시아에서 온 단풍나무였다. 나는 천천히 단풍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밟은 사람 없이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힌 단풍잎들이 발아래에 붉게 빛났다. 그 모습은 한국에서의 내 기억 속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색이 퍽 예뻐서 이 정도면 고향에서의 옛 기억 위에 새로 덮어씌워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을 떠날 때 새로 그리워할 것이 생길 것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유난히 새빨간 채로 떨어져 눈 속에 박혀 있던 단풍잎 하나를 집어 들어 올려 보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눈 속에서 꺼내면 한국에서도 수없이 보아 왔던 단풍잎들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었다. 겨울 한복판에 떨어졌음에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가장 찬란했을 과거를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던 그 모습을 나는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붉은빛 사이로 조심스럽게 물결무늬 발자국을 남기면서 나는 오랫동안 단풍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 나는 분명히 들떠 있었다. 나는 다시 산책로로 돌아와 저만치 보이는 언덕을 향해 걸었다. 언덕 위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흰 바탕에 칼로 찍어낸 것처럼 짙은 초록색 잎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올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한국의 겨울 산을 떠올렸다. 멀게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는 눈과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곳이 사실 한국이 아니고, 그러기에 그리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사소한 결함이 흐릿해졌다. 렌즈에 흡수되지 않아 더욱 선명해진 푸른색 안에 한데 뭉쳐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서양에 맞닿아 세워진 도시에서 찾아낸 그림엽서 속 한국의 모습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소나무 숲 아래에는 미국인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풍경이 문득 어색해졌다.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몽상 속에서 머물고 싶었다. 다른 언덕 위를 급히 올랐다. 시야 위쪽 끝에서 누군가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피해 능선을 타고 옆으로 돌았다. 눈에 덮여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 위의 얼음에 부츠가 미끄러졌다. 나는 문득 이곳에서 조난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웃기지도 않는 가능성이 나를 꿈속에서 억지로 끌어내 보스턴으로 내던졌다. 누군가 뒤에서 떠미는 것 마냥 허둥대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헤맸다.


작은 개울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녹은 물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잠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난 것 마냥 정신이 몸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리가 바쁘게 움직여 몸을 미국 사람들 사이로 되돌려놓았다. 도착한 곳은 분명 한국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의 번거로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