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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01. 2020

결국 실패한다면 적어도 아름다울 수는 있기를

Mount Auburn Cemetry

학교로부터 서쪽, 차로 15분쯤 거리에 공동묘지가 하나 있다. Mount Auburn Cemetry다. 앞에 Mount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언덕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봉분 없는 묘를 대신 지키는 조각품들에 눈을 빼앗긴 채로 오르락내리락거리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곧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지도가 없다면 밖으로 나갈 길을 결국 찾지 못한 채로, 해가 지고 문이 잠기면 살아있는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그 안에 갇혀버릴 그런 곳이다.


생각해보면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Felt so depressed it was difficult to function?’라고 물었을 때 10명 중 4명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곳 (http://ir.mit.edu/2019-grad-ess) 바로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 말이다. 질문을 대답한 사람들이 대학원생들이기에 function이라는 말을 제대로 번역하기란 어렵다. 학생으로서 열심히 배우는 것을 뜻하는지, 노동자로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그 가운데 있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자질구레한 수많은 역할들을 뭉뚱그려 ‘function’이라고 하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function’이 무엇을 표현하지 않는지는 좀 더 명확하다. 바라는 바가 있어도 그곳으로 향할 용기가 없어 이리저리 헤매고, 그렇게 홀로 애태우기만 하다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숨을 묫자리를 두리번거리며 찾는다면 그 사람을 제대로 ‘function’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원생의 삶은 끝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남은 마지막 선택지가 성공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눈앞에 남은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간다. 그러나 될 것이라고 믿었던 연구가 마치 던진 공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애초에 허황된 것이었다는 것을 결국 깨닫는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초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동안 쏟아온 시간을 땅에 파묻고 그 위에 매몰비용이라는 말을 냉정히 쓸 수 있을까.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계속 스스로를 땔감으로 삼아 불태워 나갈 수 있을까.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하루하루를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 땅에 묻혀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에 관계없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인간의 모든 노력 그 위에 덮어씌워지는 자연의 무자비함 앞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한다. 살과 뼈가 썩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자유롭다. 분노하고, 울고, 싸우고, 머리를 쥐어뜯더라도, 또는 웃고, 안도하고, 즐기고, 사랑하더라도 결국 끝은 같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렇게 결국 무엇을 이루든,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더라도, 그 수많은 실패들이 적어도 이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될 수는 있기를 바란다.


공동묘지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끔 멈춰 서서 비석에 적힌 이름을 읽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오늘도 일한다.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 파내 남은 선택지를 찾는다. 더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 쓰러질 때까지 이를 반복하려 한다. 아마 스스로 관을 닫을 용기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밖에서 자물쇠를 걸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찰칵거리며 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마지막 한숨을 내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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