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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마이너 Jan 30. 2024

60년대 생이 간다

귀인

주말의 이른 아침, 최근 좋아하게 된 동네의 작은 빵집으로 향했다. 이곳은 말수가 적고 유난스럽게 밝진 않지만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중년 여성분께서 운영하는 빵을 파는 카페였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변 빵집을 검색해 보던 중에 한 블로거가 이 빵집을 두고 '외갓집 집 같은 편안한 빵집'이라고 표현한 글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이제와 보니 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촌스럽고 멋없는 빵집이라 생각했지만 외갓집 같은 다정함은 다른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농밀하게 보낸 시간의 결과였다.


매번 그곳에서 포장만 해오다가, 이번 주말 아침엔 이곳에서 조금 머물러있는 시간도 가지기로 했다.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들어온 덕분에 빈자리가 많았다. 몇 군데 의자와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놔 봤다가, 활짝 열린 나무문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로 짐을 풀어놓았다. 곧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올 것만 같은 열린 문이 품고 있는 그런 설렘이 좋았다.


아직 오븐에서 나오지 못한 빵들이 많아 빈 곳이 더 많은 진열대. 고민하다 겨우 조그마한 에그 샌드위치를 하나 골라잡았다. 카운터로 가서 빵을 계산하며 아메리카노 한 잔을 함께 시켰고, 커피가 나올 동안엔 책장 앞에 앉아 꽂혀있는 몇 권의 책을 손끝으로 살짝살짝 열어보았다. 그렇게 책을 뒤적이던 중 커피가 카운터 위로 올려졌고, 나는 신중하게 골라둔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을 하려고 챙겨 나온 노트북을 펼친 후, 한 시간 동안이나 입은 집중력 주문이나 외우고, 눈으로는 사진첩만 들여다보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낭창한 모습으로 앉아있는데 슬리퍼에 트레이닝 복 차림을 한 중년 남성분께서  빵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가족들과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사기 위해 나오셨나 보다. 아저씨는 이곳에 자주 오셨던 건지 어떤 빵을 설명하시며 그 빵이 언제 나오는지 사장님께 물어보시기도 한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고민하며 쟁반 위로 빵을 골라 담았다. 그리곤 쟁반을 카운터에 올려두곤 계산해 달라는 듯 카드를 사장님께 건네 드렸다. 사장님은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손님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카드를 받지 않고 다시 진열대로 가서 조금 둘러보다가, 다른 쟁반 위에 빵을 몇 개 더 주워 담으신다. 다시 카운터로 가신다. 아저씨는 봉투에 포장되어 올려진 빵들을 보면서 다급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아마 카드를 찾고 계신가 보다.


잠시 뒤적거리다가 “어.. 혹시 이거 제가 계산했던가요?” 아저씨가 물으신다. 사장님은 카드를 보여주며 “방금 카드 주시고 계산하셨잖아요! 하하.” 웃으며 대답하셨다. 잠시 머쓱해하던 아저씨는 곧 "대신 사장님이 웃었잖아요." 말씀하시며 빵이 한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금방 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멀찍이 앉아있던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곰곰한 눈으로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저씨 발 뒤에서 팔딱거리며 쫓아가고 있는 슬리퍼 뒤축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평일에 출근을 해서 회사에 가면 중년 남성이신 팀장님을 만난다. 나이는 우리 아빠보다 1살이 더 많으신 63년 생이시다. 팀장님은 욕도 간간이 재밌게 섞어 쓰실 줄 아는 상당히 유쾌하고도 호탕한 캐릭터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내면은 매우 섬세하시고 다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눈치챌 수 있었다. 팀장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떠한 태도가 자신과 주변의 행복을 결정하는지를 아는 지혜가 많으신 분인 것 같았다. 명예와 부도 남부럽지 않게 쌓아오셨겠지마는 나는 그보다 '저분에겐 저 지혜가 보석이겠구나.'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팀장님은 그 보석을 과대포장하지 않고, 기꺼이 풀어 누군가에 나누어 줄 줄도 아시는 분이었다.


그는 아침이면 늘 먼저 다가와 "어이~ 허유리! 안녕!” 하며 시원스레 웃으며 인사해 주신다. 일을 할 때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야~ 멋진데?” 짧은 한 마디라도 꼭 칭찬을 흘리며 지나가신다. 나는 그 스치는 칭찬 한 마디까지도 꼭꼭 주워 담았다. 그 사소한 말에 담긴 어른의 마음이 소중하고 특별해서 열심히 주워 담았다. 가끔 회식을 할 때면 딸 아들뻘 되는 팀원들 앞에서 몸까지 써가며 자주 웃음을 주시고, 딱딱할 수 있는 회의 시간에도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굳어있는 분위기를 몸소 나서 풀어주신다. 또 일을 할 때는 정확한 판단력과 아이디어들로 일을 잘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시시때때로 팀원을 응원하며 성장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해 늘 노력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팀장님께서 한 날에, 회식을 하던 중 갑자기 가만히 목을 잡으시더니 "야! 너네랑 있다 집에 가면 하도 혼자 떠들어서 목이 다 아프다!"라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가 자기 말 떠들어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손에 움켜잡힌 목에서 과거 35년간의 회사생활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내가 이 분을 뵈며 가족들에게 "회사에서 진짜 어른을 만나게 된 것 같아!"라고 자주 말하게 된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건강하게 강한 선배를 만나는 것을 가장 큰 복이라 여긴다. 나에게 책은 큰 나침반과 같다면, 사람은 의외의 곳에 서서 물길의 방향을 정해주는 작은 돌멩이나 바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길을 내며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기도 한다. 세상엔 돈만 주면 길을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도 많지만, 나는 팀장님과 함께 일하며 보내는 시간 동안에 인간이라는 이 아날로그적인 나침반과 표지판이 더욱 의미 있는 여행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향기로운 어른은 번듯한 차림새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줌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간의 시간을 통해 배웠다. 자연스러움을 온몸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편견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자신의 확실성을 기꺼이 보류하려고 하는 것.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라 여기지 않는 것. 그 자세는 어른의 향기 만들어냈다. 그날의 향기를 오늘 다시 맡으며, 팀장님의 현관 앞이 궁금해졌다. 이제는 운동화를 더 자주 신으시는지, 슬리퍼를 더 자주 신으시는지. 그리고 그 걸음은 어디로 닿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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