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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Oct 28. 2020

실험의 끝에서 비로소 완성된 창작

미리 만나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혹자는 감탄하고, 혹자는 의아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라는, 순우리말 ‘시나위’와 외래어 ‘오케스트라’의 조합은 ‘국악관현악’이라는 장르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정악에 대응하며 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민속악의 한 종류이자 특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음악이 바로 시나위 아닌가. 일정한 틀 안에서 연주자 혹은 연행자의 즉흥과 자유로움으로 완성되는 정신을 가진 음악.

지난 3월 경기도문화의전당이 경기아트센터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와 발맞춰 경기도립국악단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 거듭났다. 이름에는 시나위로 대표되는 우리 고유의 음악과 오케스트라의 형식·구조를 결합해 국악이 가진 고정관념을 돌파하고자 하는 음악 철학을 담았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원일 예술감독은 ‘시나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피력했다.

“단순한 전통음악의 재현이 아닌 창조 음악 행위”

“음악을 통해 발현되는 한국 정신의 핵심”

“우리들의 삶과 연결된 공동체의 의례를 담은 음악 형식”

“자연과 나와 사회를 음악으로 연결하여 소통하기”

시나위와 결합된 ‘오케스트라’는 무한한 음악적 앙상블의 탄생을 암시한다. ‘국악관현악단’ 혹은 ‘국악단’으로 특정 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하며 유동적으로 호응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지향한다. 이로써 일반적인 국악, 국악관현악의 통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자 한다.


앙상블로 발현한 개별 연주자의 역량

변화는 원일 예술감독 취임 이후 첫 공연인 <반향>(2019년 12월 6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송년 음악회를 겸해 진행된 이 공연은 한 해를 반추하고, 다양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자 기획됐다. 크게 네 부분 ‘삶과 죽음의 제의’, ‘침묵의 제의’, ‘걷기 명상’, ‘구름처럼’으로 구성된 공연은 죽음에서부터 평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담아냈다. 원일 작·편곡의 관현악 ‘천장’과 진혼곡 ‘Bardo-K’는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곡으로, 여창 가객 강권순과 용인시립합창단의 협연으로 연주됐다. 삶과 죽음의 중간 상태를 이르는 ‘바르도Bardo’에서 착안한 ‘Bardo-K’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이색적인 기획도 있었다. 존 케이지John Cage ‘4분 33초’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거울 속의 거울’이 국악기의 음색으로 울려퍼졌다. 관객이 무대에 올라 현악영산회상 중 상령산에 맞춰 연주자들을 둘러 걷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기도 했다. 위촉 초연곡으로 연주된 원일 작곡의 ‘8음 소리 시나위’는 자연 소재에 담긴 소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공연 제목을 다르게 읽어 보자면, 그간의 경기도립국악단의 행보에 ‘반향’을 일으킨 무대였다. 무엇보다 음악이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소규모로 재편성된 악단 구성은 국악관현악이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과 자율성을 보여줬다.

2020 경기아트센터 레퍼토리시즌 첫 공연으로 준비한 <新, 시나위>(2020년 4월 17~18일)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의 변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립한 단체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음악감독 8명을 선임해 3개월간 공동 창작으로 8편의 음악을 만들어 냈고, 이틀에 걸쳐 차례로 선보였다. 베이스 연주자이자 프로듀서 송홍섭, 기타리스트 이원술, 드러머 한웅원, 색소포니스트 신현필,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 블랙스트링의 리더 허윤정, 영화음악감독 방준석, 잠비나이의 피리 연주자 이일우. 개성 강한 이들이 불어넣은 창작의 숨결로 완성된 공연은 어떤 무대보다 다채로웠고, 개별 연주자의 음악적 역량이 합주를 통해 거듭난다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지향점에 공감하게 했다. 현시대와 소통하는 국악의 형태가 이토록 다양할 수 있다니.

원일 예술감독은 연주자 개개인이 보여주는 ‘시나위’에 우리 음악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개별 연주자들의 뛰어난 역량이 앙상블을 이룬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변화함에 따라 전통예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잠재력을 끌어내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


새로운 음향, 그리고 음악에 깃든 시대정신

당초 5월 공연을 계획한 가정의 달 콘서트 <세상에 하나뿐인…>과 <易의 음향>이 잠정 연기되면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다음 공연은 <21세기 작곡가 시리즈>(9월 11~12일)가 될 전망이다. 1960년대 탄생해 현재까지 이어온 국악관현악에는 몇 가지 제한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국악기와 맞지 않는 편성과 불안정한 합주로 인해 작품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새로운 작품보다는 성공한 몇몇 작품만이 오래도록 연주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렇듯 국악기의 음역과 주법이 가진 한계는 국악관현악이 무한하게 발전하는 데 장애물이다. 이에 대해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내린 해답은 ‘음향의 변화’다.

<21세기 작곡가 시리즈>는 단순한 작곡가와 작품의 발굴이 아닌, 국악기 합주에 있어서 새로운 음향의 발명을 꾀하는 무대다. 이로써 우리 음악이 가진 고유한 음향과 정체성을 발굴하고 새로운 작품을 통해 도출하고자 한다. 기존의 관현악 형식과 작곡의 틀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소리가 탄생할 전망.


기대되는, 아니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음향, 그리고 음악에 깃든 21세기 시대정신을 위해 작곡가 장영규·양지선·라예송 그리고 밴드 동양고주파에게 작품을 위촉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는 세 가지. 그간 국악관현악 곡을 쓰지 않은 작곡가이며, 전통적인 국악관현악 작곡 기법이 아닌 컨템퍼러리 작곡을 시도하고, 음향에 한계를 두지 않는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장영규, 음악만 아니라 영화·무용·연극·시각예술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예술가와 놀라운 협업을 보여주는 음악가다. 최근 이날치의 베이시스트 겸 음악감독으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의 역량은 오래 전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다. 40여 편에 이르는 영화 음악만 해도 상업 영화부터 단편 독립영화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의 초창기 이력으로 알려진 어어부 프로젝트에서는 1990년대 후반 ‘한국적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개성을 물씬 드러내기도 했다.

무대예술에서는 1993년부터 안은미컴퍼니의 음악감독으로 <심포카 바리-이승편>(2007),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 <사심 없는 땐쓰>(2012) 등 장르 개념을 파격하는 음악을 들려줬다. 2008년 결성한 음악그룹 비빙에는 전통을 대하는 동시대적 시각이 반영돼 있고, 소리꾼 이희문과 손잡은 민요록그룹 씽씽을 통해 대중에게 사랑받는 ‘한국현대음악’을 선보였다. ‘전방위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자유롭고 단단한 음악가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함께 아악 ‘수제천’을 재해석할 예정이다. “국악관현악의 편성이 불편했다”고 말하는 장영규가 새롭게 구상할 수제천은 어떤 형태일까.

양지선, 난해하다고 하는 현대음악을 다루지만 누구보다 관객에게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작곡가다. 숙명여자대학교와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르케Arche의 음악감독으로, 음악의 근원을 재해석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고악기를 현대적으로 접근하거나 시나위를 동시대적으로 해석한 바이올린 독주곡을 선보이는 등 과거와 현대, 친숙함과 낯섦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소리와 존재와 부재, 소리의 뒤편에 존재하는 여음과 쉼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듣기만 해도 이해되는 곡”과 “솔직한 마음을 악보에 옮긴 음악”이 존재한다.

그녀가 이번 무대에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함께 들려줄 곡은 ‘소리와 국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아_에_이_오_우’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 초연한 작품을 국악기와 소리(노래)를 위해 개작한 것으로, 음이 차츰 쌓여가는 구조에서 발상을 얻었다. 특별한 구조나 복잡한 화성의 변화는 아니지만, 거대한 형상이 지하로부터 땅 위로 점차 폭발하는 음악적 형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라예송, 연주와 작곡, 평론을 오가는 동시대의 젊은 창작자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야금을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안성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과 협업한 <제전악-장미의 잔상>(2017), <순례-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2018), <검은 돌-모래의 기억>(2019)으로 주목 받은 그녀가 처음 이름을 알린 계기는 평론이었다. 2015년 국립국악원 학술상 공모에서 평론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2017년에는 자신의 작곡발표회 <흰 연기 너머>를 열었다. 음악동인 고물과도 합을 맞추며 다양한 창작을 시도해왔다.

글이든, 연주든, 작곡이든 모든 방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통의 본질이다. 그래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는 기존의 국악관현악보다 아악에 가까운 전통적인 편성으로 한국 오케스트라의 어법에 맞는 음향을 구현해 보고자 한다. 서양악기의 보완 없이 국악기만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다운 소리를 만들어 볼 계획이다.

동양고주파, 윤은화(양금)·최우영(베이스기타)·장도혁(퍼커션)으로 구성된 3인조 연주 밴드인 이들은 이번 공연에선 유일하게 팀 단위로, 또 작곡가이자 연주자로 협업한다. 연주자 구성만으로 얼핏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이는 이들은 국악과 인디,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록·국악·월드뮤직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흡수해 이들만의 낯설고도 파격적인 음악으로 재탄생시킨다.

윤은화가 작곡하고 나머지 두 멤버가 편곡을 맡은 ‘사이클’(가제)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단원 중 일부를 앙상블로 구성해 밴드와 협업하는 형태로 연주될 예정이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삶과 순환을 주제로, 사운드의 압축과 폭발, 흩어짐의 과정을 반복하는 형태의 음향 실험을 시도한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아니고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로그램.” 원일 예술감독의 취임 포부에 꼭 맞는 공연이 무대에 펼쳐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음향 실험의 결과가 어떨지,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고는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다.


*경기아트센터 매거진 [예술과만남] 2020 08/0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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