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읽기
학기 초가 되면 내밀한 탐색이 시작된다. 근거리에서 모여 대부분의 얼굴을 아는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생활은 거의 모르는 이들과 뒤섞여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것과 같다. 대학은 또 어떤가. 삶의 여러 난항은 결국 혼자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연습이다. 남이 독해한 제시문에 대해 미리 배운다니. 대학 가서 어떻게 스스로 보고서를 작성하는가. 그 어떤 잘난 스승도 아이의 머릿속을 지배하면 안 된다. 나는 간혹 길을 가다가 만나는 어린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 저 말랑말랑한 (머리를 가진) 아이들!” 난감해하는 것은 나쁜 뇌가 아니라, 딱딱한 뇌이다. 무지한데 고집불통이면 답이 없다. 도저히 대화할 수가 없다.
최대한 머리가 말랑할 때 최고의 교육을 시작하자. 바로 책을 스스로 읽는 것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며 책 읽기를 왜 미루는가? 읽으면 스스로 방법을 익혀갈 수 있는데 말이다. 일단 읽고 싶은 책을 고르자. 자, 여기서 주의할 점! 스스로 고르되, 다정한 눈길로 그를 바라볼 것. 저 아이가 나의 앞날에 도움이 되어서 사귀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애당초 권장 도서도 말 그대로 권장일 뿐이다. 명령이 절대 아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발휘할 때, 기분이 좋아지고 더불어 두뇌가 활성화된다. 옆집 아이가 이 책을 벌써 읽는다더라. 우리 반 일 등이 읽는 책이다. 강남 애들은 다 아는 고전시가이다. 서울대 필독서라고 하더라. 솔직히 기분이 좋아도 추억에 남을지 말지인데, 남이 억지로 읽힌 책, 기억하고 싶은가? 대부분의 독서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흩어진다.
처음부터 책을 잘 고를 수가 없기에, 초등학교 시절의 독서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때 개인적 취향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시절, 내가 좋아하는 책을 잔잔한 미소와 함께 떠올릴 수가 없다면, 앞으로 더욱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상당히 외로울 것이다. 고독이 아닌 외로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 서점에 갈 때마다 책을 고르는 게 좋다. 가능하면 본인 용돈으로 책을 사게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일단 내가 돈을 들여 책을 한 권이라도 사고 있다는 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고른 ‘내 책’이 마련되면, 첫 장부터 펴서 본격적으로 ‘각 잡고’ 읽지 말자. 일단, 그의 이모저모를 잠깐이라도 훑어보자. 거대한 글의 바다에 무작정 다이빙하면 안 된다. 처음엔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많은 학생이 단원의 학습 목표를 놓친 채, 교과서 본문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암기해 온다. 누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망쳐놓고 있는가? 학생들이 간혹 “아, 이 부분까지 봐야 하는지 몰랐어.”라든가 “이렇게 시험 문제를 낼지 몰랐어.” 한탄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 처음부터 책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출제 교사가 이상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교과서라면 목차, 단원의 길잡이, 학습 목표 등을 먼저 살펴보자. 예전에 어린 조카와 함께 그림책을 읽을 때는 작가에 대한 소개를 유심히 살폈다. 어머, 뉴욕에 살고 있네. 뉴욕은 어디일까. 그림도 같이 그리셨구나. 예전에 학교 선생님이셨대. 내가 읽을 책을 고를 때는 작가 소개, 목차뿐 아니라 프롤로그(들어가며)까지 먼저 살펴본다. 책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글의 의도를 먼저 찾는다. 일종의 여행지 지도를 손에 쥐는 것이다. 수능시험을 위한 문학 문제에서는 작품에 대한 <보기> 이다. 다시금 강조하는데, 의도는 본문 밖에서 미리 파악하자. 본문 안에는 글의 ‘주제’가 있다. 학생들은 나무 하나하나의 생김새를 공들여 살피다가 지쳐 나가떨어져, 숲의 전체적 양상을 놓치게 된다. 마치 셜록 홈즈처럼 사건의 공간을 전체적으로, 그러나 예리하게 보자. 기억에 남는 두 학생의 사례를 소개한다. 모두 타 학생보다 압도적으로 국어 점수를 잘 받은 학생들이다.
“이번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단원을 먼저 분석했어요. 그랬더니 왜 이 작품들이 선정되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선생님의 특성상 학습 목표에 따라 큰 그림을 가지고 가르치셨으니, 그것에 맞춰 문제를 출제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난이도에 따른 문제의 위계가 그려졌습니다.”
- 전교에서 유일하게 100점을 받은 J
“저는 여태까지 제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국어 내신 시험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의도가 선생님의 의도보다 앞서더라고요.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출제 교사의 의도가 먼저 아닌가. 수업 시간의 방향성을 되새기면서, 이전 시험지의 문제 경향을 꼼꼼하게 분석하였습니다.”
- 점수가 많이 향상된 L
이제 의도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20년 전에 학생들과 만든 구호가 있다. “Read by hand.” 그 당시 학교가 영어 특성화 교육으로 모든 안내문을 영어로 바꾸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예전부터 ‘책 바르게 읽기’에 진심이었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손으로 표시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음독이 가장 좋다. 교사들이 학생들 전체에게 학습 목표를 읽어 보라고 한다든가, 한 학생을 지정해 본문을 소리 내어 읽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눈과 귀, 즉 시각과 청각을 활용하여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도 자기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중얼중얼 소리 내며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실정이 어디 그런가! 모두 “쉿! 조용히 해!”한다. 시험 시간에도 소리를 내면 절대 안 된다. 그러니 눈과 손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간에 한 개보다, 두 개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밑줄 긋기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밑줄 긋기에 치중하다 보면, 읽어서 이해해야 할 부분을 오히려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하게 된다고 말이다. 또한 너무 많은 밑줄은 스스로 밑줄의 효용성을 놓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의미 없는 행위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우리나라’의 ‘(수능) 시험장’ 분위기를 아마도 간과하신 것 같다.
다년간 수능 시험장 감독을 들어가며 학생들을 지켜본 결과, 우리나라 입시는 솔직히 정신력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각 과목 문제를 엄청난 집중력을 분출하며 하루 종일 푼다.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따지고 보면 고도의 사고력을 요하는, 또는 창의성을 요하는 시험이 절대 아니다. 그저,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푸는 것인데, 정답은 이미 출제자가 객관식 문형 안에 유도하고 있다. 시험 끝난 후에, ‘아, 제시문의 근거를 그땐 왜 놓쳤지?’ 또는 ‘선지의 이 낱말을 왜 잘 못 봤지?’ 하고 한탄하는 시험이다. 눈의 감각 하나에 의지하기에는 여유가 너무나도 없다. 나는 답을 고를 때까지 눈으로만 글을 읽고 있는데, 옆에서 사각사각 표시하며, 휙휙 장수가 넘어가면 정신적으로 초조해진다. 그럴 때 불안한 눈을 잡아주는 것이 손의 감각이다. 내 손으로 그리는 ‘표시’ 밑줄이다. 밑줄 대신 어떤 표시를 하든 상관없다. 자신만의 표시 방식으로 머리에 각인하면 된다.
이제 글의 제목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질문해 보자. 여기서 포인트! 고갯짓이다. 왜 이런 제목이지? 제목은 사람에게 있어 이름과 같다. 아기가 태어날 때 이름을 고심하듯, 필자(작가)도 글을 작성(창작)할 때, 제목에 대해 상당히 고심한다. 고등학생들의 필독서 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있다. 문학 교과서의 단골손님인데, 이 작품에 대해 제대로 수업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왜냐하면 연작소설 중 하나의 단편만을 싣는데, 교과서 안에 다른 작가 작품들도 한데 넣다 보니, 단편 하나조차 온전히 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쪼개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앞부분의 줄거리>, <중략 줄거리>, <뒷부분 줄거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작품은 대략 배웠는데 제목의 의미는 끝까지 모른다. 난국 수준이 아니라 비극이다. 그럼에도 제목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까. 이것이 교사의 능력을 가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능의 소설 문제 제시문은 그 어떤 문학 제시문보다 한계점이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고갯짓을 하며 질문해야 할까? 의미 없이 들어간 텍스트가 없듯이, 의미 없는 비언어적 표현(몸짓, 표정 등)도 없다. 앞서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발휘할 때, 기분이 좋아지고 더불어 두뇌가 활성화된다고 언급했다. 그 학습 동기를 계속 유지해 주는 것이 몸짓과 탐구적 질문이다. 왜 그럴까? 갸우뚱해야 비로소 읽는 준비 운동이 된 것이다. 잘못 배운 학습이 아이를 세세하게 망친다는 것은 아이의 사고를 막아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전에 보았던 어떤 수업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제 이름이 뭐죠?” 질문하니까, 애들이 입을 모아 “갓**”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이 곧 그 과목의 갓(GOD)이라고 말이다. 이건 코미디와 다를 바가 없다. 강의식 수업으로 약장수처럼 해설(약)을 파는 것이다. 아이들을 ‘비본질적’으로 ‘홀리면’ 절대 안 된다. 학생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맞아? 이게 과연 그런 거야? 선생님 제 생각엔…. 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수업이다. 적어도 아이들의 사고를 막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홀리듯이’ 수업 듣는 게, 책 읽는 상황에서는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이’ 읽는 것이다. 이렇게 12년을 살게 되면, 공교육뿐 아니라 사교육까지 학생들 일상을 지배하면, 말 잘 듣는 인형 같은 노예가 된다. 누가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겠는가. 말한 김에 적절한 예를 들면, 예전에 우리 때는 책 안 읽고, 텔레비전만 보면 바보가 된다고 어른들이 협박했다(지금은 스마트폰이 텔레비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뇌가 정지해 있다고. 일방적 수업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수업은 듣는 게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간다(바닷물에 천천히 간다). 고개는 여전히 살짝 삐딱하게. 아까 생각한 글의 의도와 제목에서 떠올린 질문을 염두에 둔다면, 글의 종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될 것이다. 학생 여러분이 대부분 읽는 글은 문학 또는 비(非)문학이다.
글의 종류가 문학이라면, 4대 갈래별 읽기 전략이 각각 있지만, 이것을 아우르는 본질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데 있다. 이를 글의 ‘제재(글의 중심 소재)’라고 한다. 비문학의 설명문 제목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노출할 수 있기에 수능 시험에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은 제목과 작가를 제시한다. 어차피 함축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글이기 때문에 제목을 노출해도 못 알아듣는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고전문학은 거의 한자어 제목이니, 처음 본 작품의 제목은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아무튼 한 단락, 한 단락 읽어가면서 그 무엇을 싸고 있는 껍질을 제거해 나가며, 존재에 대해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편의상 무엇을 A라고 하겠다. (손으로 각인하는 순간 머릿속에 A의 이미지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다) 읽어가면 갈수록 A 주변에 연관성 있는 존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모스 옆에 폭풍우가 오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장이’ 집에 철거 계고장이 온다. 한 마디로 A는 바다의 파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책을 잘 안 읽는 학생들은 A가 주변의 상황에 따라 움직이며, 여러 관계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 눈동자가 흔들린다. 배가 흔들거리면서 멀미가 나는 것이다. 애당초 선장이 모는 배에만 탑승해 봤으니, 혼자 바다에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이 클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스스로’를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바다에 혼자 나가야 한다. 신나게 서핑한다고 상상하자. 어차피 글의 바다에 파도가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글의 파도에 몸을 맡기며, A를 구체화하기 위해 도와주는 요소들을 재미있게 결합하자. A 옆에는 B처럼 보였지만 A’가 있을 수 있고, a가 있을 수도 있다. 외피를 둔갑시키며 여러분을 위협하는 변신 로봇에 당당히 맞서자. 파도에 절망하지 말고, 파도를 타며 여러분의 A를 계속 따라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Read by hand.”를 잊으면 안 된다. 손으로 의미에 표시하면서 읽기의 리듬을 타야 한다. 여러분의 목표는 바로 A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즉 무엇이 어떻다(A는 ~이다)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스스로 독서의 일차적 목표이다. 그것을 ‘주제’라고 한다. 한 번 읽고 주제를 발견하는 건 상당히 힘들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제목에 대한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여러분은 이제 ‘스스로 힘’으로 글의 바다에 입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