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계속 만난다면(반복적 읽기)

- 바르게 읽기

by 리라

이제 스쿠버 다이빙을 상상해 보자. 거대한 바다의 갖가지 파도를 이미 경험해 보았으니까. 바닷물 좀 먹으면서 이미 체력 고갈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원점이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바다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핑이 아니고, 다이빙이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조언했다. 독후감을 써야 한다고? 적어도 3번은 읽고 써라. 한 번 읽고 글의 주제를 파악한다고? 글쎄, 교사도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 놓는다. 그러면 이 못생긴 것은 쪼일 적마다 주둥이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면두를 또 쪼이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진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대강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같이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지게막대기를 메고 달려들어 점순네 닭을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 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감자 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하략)

- 김유정, 「동백꽃」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다. 학생들이 어떻게 이 소설에 대해 아는 척을 할까? 가상적으로 독후감을 한 번 써 보겠다.



얼마 전 여행 가서 빨간 동백꽃을 보며, 소설 ‘동백꽃’이 생각났다. 동백꽃을 배경으로 예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로 점순이와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이들의 풋풋한 사랑이 떠오른 것이다. 동백꽃의 알싸한 향기에 아찔했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청춘의 사랑은 아름다운 꽃이라 생각한다.


어떤가? 작품에 대해 꼼꼼하게(제대로) 읽고 쓴 글일까? 내가 위에서 ‘동백꽃’ 본문을 제시한 부분은 소설의 첫 부분이다. 그런데 위 독후감은 첫 부분도 담지 못하고, 제목(동백꽃)의 상징성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 왜 그럴까? 작품의 주제를 암기한 것 이상의 인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수박 겉핥기처럼 수박의 달콤한 내육은 모른 채, 그저 딱딱한 음식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도 씹어야 맛을 알기 때문에, 이제 글 속에 입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읽기’ 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읽으며, 사실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 추론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서술의(사건) 의미를 밝히기 위해, 그것의 이유를 따지면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연작소설에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읽으면 등장 인물인 ‘왜냐 선생님’을 통해 방법론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왜 반복적으로 점순이는 닭싸움을 조장하는가. 우리 닭은 점순이네와 비교할 때 왜 이렇게 약하고, 매번 싸움에 지는가. 그리고 갑자기 왜 ‘나흘 전 감자 건’이 나오는가 등등.

한 단락의 의미와 다음 단락의 의미를 서로 연결해 가면서 A(주인공, ‘나’)의 상황을 세부적으로 파악해 나간다.



‘나’는 산으로 가서 일해야 하는 인물(지게도 지고)인데,

자기네 닭이 점순이네 닭한테 반복적으로 공격당하니까

일을 못 나가고 싸움을 말리고 있다.

그런데 나흘 전 감자 사건 때도

점순이가 나의 일(울타리 엮는 일)을 방해했다.



자, 그렇다면 두 남녀의 환경과 관심사가 다르다. 점순이는 나보다 한가하고, 나의 일을 간섭한다(수작을 부린다). 나는 일해야 하는데, 점순이에 의해서 닭처럼 억울하게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정말 향이 없는 꽃으로 유명한 ‘동백꽃’일까? 애당초 교과서 삽화에서도 ‘노란색 꽃’으로 고증을 잘해 놓고 있는데, 제목인 동백꽃의 의미가 ‘생강나무’의 사투리인지 학생들은 왜 기억하지 못할까? 이들의 싸움은 ‘알싸한’ 것이다. 일단 소설의 첫 단락부터 희생되는 닭(‘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지고)이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화를 못 참은 ‘내’가 점순네 수탉을 죽인다. 그걸 편안하게 사람들이 사진 찍고 있는 ‘동백꽃’에 갔다 댈 바가 아니다. 진짜 알싸한 사랑 이야기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는가? 자세히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자세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도저처럼 땅을 파 내려가야 한다.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반복적 읽기’이다. 즉 반복해 읽으면 어느 순간 ‘바른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저기 땅을 얕게 파헤치면서 다니면 땅속 보물이 나오는가? 죽도 밥도 안 된다. 한 군데를 집중해서 계속 파자.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다면? 먼저 하나의 작품을 계속 읽으며,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본질적 뜻을 향해 나아가라. 바닷속 해저까지 내려가는 데 한 번 성공하고, 진귀한 보물을 스스로 발견해 보면, 이제 자유자재로 다이빙하며 바다를 보는 안목이 길러지게 된다. 노하우가 저절로 만들어진다. 이제부터 내가 중학교 때 경험한 ‘기적의 백 점’ 비결을 풀어보겠다.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어머니께서 좋은 책(그 당시엔 전집이 유행했다)을 많이 사들이셨는데, 새 책들이 들어오면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해, 책꽂이에서 빼는 시간도 아까워서 바닥에 쌓아놓고 읽을 정도였다. 친구들 집에 가서는 우리 집에 없는 책들을 구경하고, 빌려와 읽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문 실력도 좋아졌다. 읽기가 생활화되니 쓰기, 말하기는 그냥 저절로 향상되는 것이다. 학교 대표로 독후감 대회에 나가는데, 글씨체가 안 예뻐서, 추천받은 다른 학생의 글씨체를 흉내 내 연습한 적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책을 읽어도 반에서 국어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학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우리나라의 국어 시험을 잘 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책을 아무 부담 없이(평소의 독서는 시험 대비를 목적으로 읽지 않는다) 가볍게 보는 것보다, 정해진 (시험) 범위를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숙지한다는 것은 텍스트의 본질을 관통한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시험 출제자의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적 이해의 차원을 한참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독서 과목 시간에 일부러 수업한 장석주 씨의 글을 인용하며 의미를 부연한다.



내 본격적인 독서 편력은 20세 때에 시작된다.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나는 시립 도서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온갖 책을 읽었다.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을 기세로 덤벼들었으나 물론 그것은 터무니없는 꿈이었다. 나는 날마다 책 한 권을 읽는 원칙을 세우고 그에 따랐다. 반가통(半可通)이 사물의 이치를 어렴풋하게 이해하는 것이라면, 전가통(全可通)은 사람이 깨치고 알아야 할 사물의 이치와 앎의 전체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르헤스나 이덕무나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이들은 전가통의 세계를 추구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삶의 기초 소양이 되는 앎은 반가통의 앎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반가통의 앎이 진리로 두루 통용되는 사회이다.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진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반가통의 세계에서는 그런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하략)

- 장석주, 「나의 독서 편력기」 중



장석주 씨의 말에 따르면 ‘전가통’의 세계를 추구할 때, 그 글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윗글을 수업한 이유는 다른 밑줄 때문이었다.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진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부분에서 정말 전율이, 감동이 컸다. 학생들은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국어 과목 선생님이셔서 국어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다른 과목, 즉 영어와 수학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문제 유형을 많이 접하면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내신 준비용으로 문제집을 3권~5권까지 풀었다. 국어도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했는데, 점수가 형편없는 거다. 기억하건대 79점이었나? 81점이었나? 노력에 비해 낮은 점수였다. 억울해하며,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문제집 풀었는데) 왜 점수가 안 좋은지 여쭤봤다. 솔직히 내가 어휘력 등의 국어 사용 능력이 없는 학생도 아니지 않는가? 아, 물론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건 사실이다. 선생님께서는 시험 보기까지 국어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물어보셨다. 당혹해하며 두세 번 읽었다고 대답했다. 내 생각엔 그마저도 공부 시간에 진도 나가면서, 필기 내용 확인하면서 읽은 게 전부였다. 공부 시간에 집중하며 들었고, 필기 내용도 다 이해했다고 판단했으니, 실제적으로는 문제집만 계속 풀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아침, 저녁으로 책을 읽되, 항상 배운 진도까지 누적하면서 읽으라고 조언하셨다. 그렇게 하면 정말 점수 잘 나와요? 의아해하니 일단 반복적으로 읽어 보라고 하셨다.

다음 날부터 정말 아침에 한 번, 저녁에 자기 전에도 한 번 국어책을 읽었다.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책만 읽으면 해결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조언을 한 번 따라보자 마음먹고 다음 시험 때까지 그렇게 읽으니, 한 달에 대략 60번을 읽게 되더라. 같은 페이지를 60번 읽는다는 걸 상상해 보라. 처음엔 지겨워 미칠 것 같다.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그래도 내가 누군가. 워낙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니, 같은 페이지 몇십 번을 또 좋다고 읽는다. 그렇게 2학기 기말고사(지금의 2차 지필) 때까지 읽었더니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학기 첫 시험에 낮은 성적을 받은 내가, 2학기 마지막 시험에서는 유일하게 백 점을 받은 학생이 된다. 근 6개월 이상을 꾸준히 반복 읽기를 한 결과로 말이다. 지금도 기말고사 시험지를 처음 받아 든 때가 잊히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내가 예상한 문제로 구성되었다. 반복 읽기의 결과로 나는 시험 범위의 내용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시험 출제자의 눈높이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의 문제를 예상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물리적으로 유출되지 않았으나, 정신적으로는 유출된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출제자인 선생님께서도 본문을 완전히 숙지한 읽기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 출제하실 때 유효하다….

에이, 한 과목에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여유가 있냐고? 또는 결국 필기를 암기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읽기 초기에는 계속 누적하며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선생님의 필기 내용에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날이 갈수록 선생님의 필기 그 이상의 맥락을 형성하며 읽게 된다. 지엽적으로만 해석되던 작품의 의도가 보이고, 단어, 문장, 단락으로 글의 몸집이 단단하게 결집하며, 이해, 추론, 비판의 단계에까지 내 사고가 팽창한다. 단선적으로 보였던 A가 글이 진행되면서 성격을 지닌 생물체가 되며, 자기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멋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게 “아~”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된다. 내가 드디어 “A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경지에 이르게 되니까! 부담스럽게 시험을 대비하는 학생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시험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교사의 신분을 넘보게 된다. 문제 안목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부담이 행복한 고민으로 바뀌게 된다. 즐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생쥐인 나의 한계를 버리고, 거대한 고래와 우정을 쌓게 되는 것이다. 얼굴은 비록 피곤하고 땀에 절어 있으나, 눈은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게 된다. 교사는 신이 아니다. 신이 될 수도 없거니와 신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 청출어람이라는 고전적인 말처럼 여러분의 능력과 사고가 그 어떤, 이전의 바다 물결보다 푸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의 푯대로 삼아, 함께 그리고 바르게 나아간다.



이전 03화나는 너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