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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초맘 Apr 24. 2020

그녀의 외박

미주 뉴스코리아  <슬초맘의 작은 행복찾기> - 2008년 2월

그녀가 '외박' 파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외박, 그러니까 자기들 표현으로는 슬립오버(sleepover)가 되겠군요. 미국인 친구 에밀리의 생일에 밤 늦게까지 놀고 함께 자는 파자마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초대를 받은 슬초는 신이 나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대장을 받아 든 슬초맘의 손이 살짝 떨립니다. 그 이유는 만 여섯살 우슬초 여사의 외박 실패기를 들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부터 아기 침대인 크립에 따로 재우는 문화의 미국에서 자랐지만, 우슬초 여사는 아직도 엄마 품에서만 잠이 듭니다. 매사에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독립적인 녀석이기에 좀처럼 매치가 안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사실 슬초맘도 그간 그다지 문제를 삼지 않았더랬지요. 하지만 초등학교에 가야 할 나이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은 이 곳 미국적인 문화에서는 펄쩍 뛸 일이라서, 최근부터는 따로 재우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좋아라하는 이층 침대를 사 주면 혼자 잘 수 있을 듯 하여 이층 침대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엄한 슬초맘이 슬초와 함께 어린이용 이층 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지요.


우슬초 여사님께서 처음으로 슬립오버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것은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친한 한국인 친구 집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었으나 녀석이 하도 자신만만해 하길래 보냈더랬지요. “슬초는 Big Girl 이니까 슬립오버할 수 있어~~!” 라며 으쓱으쓱 집을 떠나는 녀석 뒤통수에 “잠 안 오면 엄마한테 전화해~” 라고 외쳐보낸 슬초맘,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간만에 친한 집에 놀러가 밤 늦게까지 야식을 즐기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결국 11시가 한참 넘은 한밤 중에 전화가 울리더군요. 같이 놀던 친구들은 다 잠이 들었건만 슬초 녀석만 유독 잠을 못 자고 친구 아빠(!)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런 민폐가 있나 싶어 당황한 마음에 달려가보니,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가 당당히 말하더군요. "슬초는 아직 어려서 슬립오버가 조금 힘들어~!" 이눔시키가 입만 살아가지고...콱 그냥! 그러나 하늘을 찌르는 그녀의 자존심에 행여 상처가 갈까, 친구들이 자고 있을 때 조용히 업어왔다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들이 아직 자고 있을 때 다시 조용히 업어다 놓았더랬습니다. 그런데 또 한번의 슬립오버라니요. 그것도 이번엔 미쿡인 친구집.


슬기로운 슬초맘, 기지를 발휘하여 다른 핑계를 대며 조심스럽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에밀리가 슬초와 다른 여자 친구 하나만 초대했고, 슬초가 꼭 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난감합니다. 슬초맘, 결국 모든 사실을 자백하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 나에게는 아무렇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 놀라운 뉴스를 들고 나타난 이 외쿡인 엄마는 순간 육아 빵점의 엄마로 평가되었기는 했지만, 식은 땀이 삐질 나는 이 민망한 상황에서도 여차저차 이러저러하니 혹시 슬초가 잠 못들고 방해하면 꼭 전화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엄마의 민망함을 이해할리 없는 우리의 우슬초 여사는 이제 자기도 여섯 살 'Big Girl' 이니 슬립오버를 잘 할 수 있다며 또 으쓱으쓱 빅걸 타령입니다. 아... 아이 키우는 거 쉽지 않습니다.


드디어 그녀의 첫 번째 외박 날.  에밀리 엄마가 슬초를 일찍 픽업해 갔고, 밤이 늦도록 연락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슬초맘은 슬초 그녀가 과연 잘 하고 있을까 걱정이 되어, 핸드폰과 차 키를 손에 꼭 쥐고 언제라도 달려나갈 수 있는 태세로 소파에 쭈그려 앉아서 새우잠을 잤더랬습니다.  다음 날 오전 10시, 슬초빠가 에밀리네 집에 가서 신이 난 슬초를 데려왔습니다. 이러저러 해서 무슨 놀이를 했고, 무엇을 먹었고, 다른 아이들은 다 늦게까지 놀았는데 자기는 먼저 잠이 들었고... 그녀에게선 재잘재잘 자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 녀석이 여섯 살이 되니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휴우우우.... 정말 다행이다. 그녀의 외박 성공기에 슬초맘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그날 밤, 여전히 엄마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슬초에게 여느 때처럼 책을 한 권 읽어 주고 자장가를 한 곡 불러준 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물어보았습니다. “슬초는 엄마 없이 코 자는 데도 안 무서웠어? 이제 우리 슬초 다 컸네~~” 그러자 그녀의 씩씩한 대답이 들려오는군요. “엉~ 하나도 안 무서웠어~ 에.밀.리. 엄.마.랑. 같.이. 잤.거.든!”  허걱. 뭣이??!!! “친구들하고 안 자고?” 놀란 슬초맘의 반문입니다. 그러자 슬초가 자랑스러워서 어깨까지 으쓱대며 대답을 해 주네요. “엉~ 친구들은 친구들끼리 자고 슬초는 에.밀.리. 엄.마. 침.대.에.서. 같.이. 잤.어~! 하나도 안 무서워쪄~~!!” 오 주여... 이제 에밀리 엄마 아빠 얼굴은 다 봤구나.


친정 어머니와 통화 중, 우슬초 여사의 외박 소식에 친정 어머니께서 목에 핏대를 세우시며 소리를 지르시는구요. “그 피가 어디로 갔겠냐? 네가 슬초만 했을 때 실종되어서 내가 울면서 온 동네 방네 찾아다니다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친구를 사귀어서 그 집 가서 밥 먹고 놀고 잠 퍼자고 있더라! 다 니 뻔뻔함이 유전된거지! 나도 너 때문에 온 동네에 얼굴 다 팔고 다녔다 이것아!”  하기사, 어린 시절은 잘 모르겠지만 슬초맘의 희미한 기억 속엔 대학시절에 술을 먹다가 그 선술집 주인 할머니 댁에서 잠도 잘 자고 아침까지 얻어먹고 다시 학교에 가곤 했던 철면피스러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급 할말이 없어지는군요.


하여튼 그 사건 이후로 슬초맘은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고마움'보다 더 강력한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행여 에밀리 엄마를 만날까 피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지요. 엄마란 실로 극한직업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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