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선물 덕에
꿈결 같은 꽃향기 옆에서 우리가 상의하는 내용이란 온갖 세세한 것들이다. 책의 판형, 종이의 질감, 두께, 가격, 사진의 밝기, 위치, 글자의 모양, 크기, 간격, 글의 순서, 조사 하나, 부사 하나를 두고 한참 대화를 주고받는다.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 그럼 나는 반대하고 새로운 것을 제안한다. 그러는 사이 내가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신뢰하는지 잊힐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반대 의견을 꽃수레 같은 언어에 태워서 보낸다. 하루는 선생님에게 묻는다. 제가 하나하나 관여해서 혹시 피곤하시느냐고. 선생님은 대답한다. 정성과 예의를 갖추는 선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침범해야 한다고.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않느냐고.
본격적으로 추워지던 겨울날, 같이 일한 작가님으로부터 이슬아 작가님의 ‘끝내주는 인생’을 선물 받았다. 사랑과 침범에 관한 구절에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라디오 하던 때를 돌아보면 모든 게 처음이라 서툴게 연애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당신이라는 사람도 처음, 당신을 만나 발견한 나의 낯선 모습도 처음, 우리가 만들어가는 사랑도 처음. 그 모든 처음은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 같았다. 존재 자체로 축복이고 너무 기쁜 대상이지만, 작은 바람에도 꺼져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행복 말이다.
사랑에 대한 초조함은 관계의 균형추를 망가뜨린다. 우리가 하는 것이 사랑일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사랑이란 걸 알기나 하는 걸까? 모든 질문은 다시 말해 바람이었다. 당신이 나를 더 사랑했으면. 내가 아는 사랑이 틀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영원히 사랑했으면. 이 모든 바람들은 희미하던 촛불을 끝내 꺼트린다.
그 모든 게 사랑이었어요. 지나고나서야 하는 말이지만요.
이어지는 네 곡은 오직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불렀다.
적룡부대의 나무판자 위에서 나는 용기가 잔뜩 꺾인 채로 서 있었지만, 사랑받지 않으며 용기를 잃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 오직 한 사람만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기에 취했을 때는 한 사람이라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라디오의 위기라고 한다. 라디오를 하면서 매일 생각했다. 사실은 회의했다. 누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는 한 걸까.
그 증거는 청취율 조사 결과일까. 1년에 4번 수도권 거주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여론조사가 그 증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매일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 개수가 그 증거일까. 보이는 라디오를 할 때마다 집계되는 전 세계 이용자수가 최신의 공신 기록인 걸까.
혼자서 생각해봤자 답 없는 질문의 뫼비우스 띠에 질식하다가 깜빡했다. 오늘 하루가 외로웠던 누군가에게 목소리로, 노래로, 웃음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나의 사랑과 용기를 과신했고, 어느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을 그 순간을 지나쳤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다시 라디오 곁에서 자주 외로워하고 이따금 회의를 거듭할 것이다. 다만 무기력한 회의에 파묻히지 않도록 들어주는 한 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있을 것 같다.